내 며늘아이에게는 택호를 지어 주리라.
먼 미래가 아닌 가까운 미래에 며느리를 얻을 것이다. 설마, 아들 두 놈 다 장가를 못가거나 안가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니 꼭 며느리 맞이하는 기쁨은 누리겠지. 며느리를 보면서 마냥 기쁘기만 할 것 같지도, 그렇다고 아들을 뺏겼다는 서운함만 있을 것 같지도 않지만, 그래도 며늘애에게 존경은 아니더라도 시어른으로서의 기본적인 위함 정도는 받고 싶다.
며늘아이를 대우해 줘야, 가는 정 오는 정으로 나 또한 며늘애에게 대우를 받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대우한다는 것은, 서로의 격을 인정하고 받아 들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어른과 며느리의 격을 세운다고 해서 시어른은 전제군주처럼 떠 받듬의 대상이고, 며느리는 궁중의 무수리처럼 존재없이 일만 배정받는 차원의 격이 아니라, 서로의 기본적인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내 생각이다.
시부모가 며느리의 이름을 직접부르고 며느리 또한 시부모님을 엄마, 아빠로 부르며, 친딸과 부모처럼 부름말에 격이 없는 경우를 본다. 솔직히 난 거북스럽다. 시어머니가 며늘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좀 그렇다 치더라도 시아버지까지 며늘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거북스럽다 못해 경망스럽게까지 느껴진다. 이러는 내가 시대에 뒤떨어진 고루한 고집불통으로 보일 수도 있다.
우리는 아들을 장가 보내서 며느리를 얻으면, 며느리의 고향 마을이름 등으로 택호를 지어 집안 사람들과 마을 사람들이 성인이 된 아들과 며느리를 이름 대신에 부를 수 있는 호를 만들어 주는 좋은 전통이 있다. 난 결혼하고 택호를 받지 못했다. 그냥 후조처거나 병섭어미 또는 작은애로 불리고 있다. 막연히 나도 택호를 받았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남편이나 아이에게 덤으로 얻어진 내가 아닌 택호로라도 불리는 개별적인 나로 인정받고 싶다.
며느리 개인의 인격을 존중하기 위해 난 며느리에게는 이쁜 택호를 지어 주어야 겠다. 그냥 이름을 불러주면 좋지 않겠냐고 하겠지만, 그것은 시어른이 며느리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품위의 문제라서 싫다. 옛날에는 며느리의 고향마을 이름을 주로 택호로 지었다지만, 요즘 세태에 맞게 온 가족이 둘러 앉아 택호를 짓는 즐거움도 누려야 겠다. 그리고 집안 어른들을 모시고 택호를 소개하고 축하해 주시라고 고할 것이다.
아직 애인도 없는 아들녀석을 장가보내 지어줄 택호를 고민하느라 누리는 즐거움이 나만의 즐거움이지는 않을까? 뭔 구닥다리 택호냐고 지들 집에가자마자 던져 버리는 초신세대 며늘애에게 당첨되지는 않을런지? 이 신고부문화 시대에.
◆ 號(호)의 기준 작법
㉠所處以號(소처이호) : 생활하거나 인연이 있는 처소로 호를 삼는 것
㉡所志以號(소지이호) : 뜻이나 이루고자하는 뜻으로 호를 삼는 것
㉢所遇以號(소우이호) : 환경이나 여건을 호로 삼는 것
㉣所蓄以號(소축이호) : 좋아하거나 간직하는 것으로 호를 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