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향

강남악부 부유행에 나와 있는 부유현 다섯 마을 찾아보기

소띠여사 2009. 5. 8. 16:41
 『강남악부』<부유행>에 나와 있는 부유현 다섯 마을 찾아보기.

연정(蓮亭): 천평 마을은 마을 형성 시기가 757년으로서 부유현 때부터 생성된 마을이며, 

                현의 소재지인 창촌으로부터 가깝다. 천평은 우리말 이름이 샘바대인데,

               이는 보조국사가 샘터를 잡아 주었다는 전설이 있고, 지금은 매립되었지만

               그 샘 밑에 연꽃이 있던 연못이 있었기 때문에 천평이 연정이 아닐까하는 생각. 

여의방(如意坊): 용촌을 지금도 나이 많으신 어르신들께서는 용머리라고 칭하신다.

                       여의주와 용은 동의어쯤이 아닐까하는 생각.

청향정(淸香亭): 행정이 아닐까? 청향정이 행정(杏亭)으로 바뀌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귀두정(龜頭亭): 1. 오산은 자라처럼 생겼다고 해서 ‘자라 오(鼇)’자를 쓴다는 데,

                            자라와 거북(龜)은 같은 뜻이 아닐까하는 생각.

                       2. 구산은 거북형상을 하고 있어서 옛 이름이 ‘거그메’라고 한다는 지명유래   

                           대로 귀두정이 구산이 아닐까?

                          ‘거그메’라는 순 우리말이 거북머리를 말하는 것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면

                         답이 딱 들어맞겠다. 국어학 공부도 해 봐야 쓰나?

둔기동(屯基洞): 둔대 마을의 지명유래를 보면, ‘고려말 군량미저장고 터라 하여 둔터라  불리다

                       둔대로 개칭되었다.’고 하는 것으로 봐서 둔기동이 둔대가 맞을 것 같다는 생각.


부유행(富有行)

《승평지》에 이르기를, 부유현(富有縣)2)은 백제ㆍ신라 시대부터 고려 초에 이르기까지 본부(本府)에 속해 있었는데, 현의 산수가 빼어났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이곳이 오랫동안 비어 있다가 순창(淳昌) 사람인 조(趙)[건곡선생 虔谷先生]씨가 옮겨와 이곳에 살게 되었고, 그 자손들 때 저성(著姓)이 되어 가장 번성하였다고 한다. 정유재란 때에 유총병(劉總兵)3)이 병사를 이끌고 이곳에 주둔하면서 적을 피하였는데, 그들도 여기에 오래 머물렀다고 하였다.

 

<보주(補註)>; 건곡(虔谷)선생 조유(趙瑜)는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 원길(元吉)의 아들이다. 고려 말에 벼슬하였으며 관은 부정(副正)4)에 리르렀다. 우리 성조께서 임금이 되신 뒤 건곡선생은 순창의 건곡리에 머물렀고, 늘그막에는 부유현에 자리 잡아 살았다. 그 후로 부유현은 점점 번성하여서 다섯 마을이 있게 되니, 첫째는 연정(蓮亭), 둘째는 여의방(如意坊), 셋째는 청향정(淸香亭), 넷째는 귀두정(龜頭亭), 다섯째는 둔기동(屯基洞)이다. 마을에는 열두 집이 있었는데, 큰 대문집인 조씨네가 번성하였고, 비로소 이에 정(鄭)씨네, 유(柳)쌔네들도 그 성씨를 드러내어 살기를 여러 세대에 이르니, 인물이 많고도 잘나서 본 고을이 제일촌이 되었다. 따라서 그때 회자되던 노래에서 이 고을을 ‘소강남’이라 칭하였으니, ‘소강남’이란 이름은 대개 이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부유(富有)는 옛 고을이니,

신라ㆍ백제 이전부터 있었다네.

북으로는 아미산(峨眉山)에 맞닿아 있고

서로는 광천(廣川)을 치는구나.[아미산은 부유의 북쪽에, 광천은 부유의 서쪽에 있다.]

하늘의 도는 차례로 있고

사람의 일은 저절로 변하는 것.

옥인(玉人)이 처음 근본을 세우니

구름처럼 일어나 가보를 지키네.[여말에 진사 박수(朴綏)가 건곡선생이 숨어 거하던 곳에 제(題)하기를, ‘남향에서 옥인이 거한 곳을 다시 묻나니’라 하였다.]

이름 있는 집안이 실로 세 성씨네요.

절도 있는 행위는 도한 여덟 현인이라.[세 성씨는 조씨ㆍ정씨ㆍ유씨이다. 여덟 현인 중 건곡선생의 둘째 아들인 숭문(崇文)과 그 아들 철산(哲山)이 경태(景泰)5)  6년 병자에 육신의 난에 함께 피살되었다. 선생의 손자 지산(智山), 지곤(智崑), 지륜(智崙), 지강(智崗) 네 사람은 우애가 깊어 부유현의 서쪽 겸천(謙川)가에 상호정(相好亭)을 지었다. 판관 정승복(鄭承復)은 어려서 경서ㆍ사서에 통달하고 무예는 더욱 잘하여서 무과에 올랐으며, 을미왜변 때에 추자도(楸子島)에서 대첩을 거두었다. 그 손자인 빈은 임진왜란 때에 의를 떨쳐, 왕을 섬겨 특별히 봉사(奉事) 벼슬을 받았다.]

문물이 번화하며 더욱 번성하여져

훌륭하고 아름다움이 이 땅을 진동시키네.

때는 바로 정유재란이 터졌을 때,

유장군이 만전을 기울였다네.

풍토는 시(詩)가 담긴 그림 같으니,

그 맑고 고움이 지금까지 전한다네.

                                                  **조현범선생의 『강남악부』의 부유행(富有行) **에서

 

조현범(1716~?): 자는 성회(聖晦), 호는 삼효재(三效齋)이며 본관은 순창이다. 숙종 42년(1716)에 순천부 주암면에서 동언(東彦)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일찍부터 가학(家學)을 계승, 누차 향시(鄕試)에 뽑혔고, 경사(京師)에 출입하며 경중사자(京中士子)들과 교유하였다. 1874년(정조 8) 나이 69세 때 순천 지방의 인물ㆍ기사(奇事)ㆍ풍속ㆍ지리 등 갖가지 사적(事蹟)을 모아 《강남악부(江南樂府)》를 편찬하였다.


주암면사무소 홈페이지 지명유래

접치

해발 210m 1630년경 전주이씨 이조화공이 선산을 수호가기 위해 살았다고 하나 그 이 전부터 함씨들이 살았다고 구전되기도 한다. 처음에는 학동이라 부르다 1914년 접치로 개칭되었다.

행정

해발 165m 1480년경 목천 장씨와 강능 함씨가 처음 자리를 잡았다고 하며 중간에 김해김씨가 들어왔다고 한다. 은행나무 정자가 있어 은행정. 오능정. 행정으로 불리다 1914년 행정으로 개칭되었다.

갈마

해발 122m 1300년경 영월 엄씨. 김해김씨. 밀양박씨의 3성이 모여 형성하였다 하며, 목마른 말이 물을 마시는 형국이라 하여 갈촌이라 불리다 1914년 갈마라 개칭하였다.

감성

해발 120m 1500년경 인동 장씨. 하동정씨가 처음으로 터를 잡았다하며, 마을 형성 당시 양성씨의 꿈에 하늘에서 길성이 뻗쳤다 하여 갑숭골로 불러오다 중간에 감성마을로 개칭되었다.

동촌

해발 120m 1600년경 광산김씨 3형제가 지금의 천평 마을에서 수해를 만나 터를 잡고 이주하였다 하며 타 마을에서 보아 동쪽에 있다고 하여 동촌이라 불렀다.

주암

해발 140-150m 500여년 훨씬 전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처음 터를 잡은 사람은 옥천 조씨 부정공 조유의 후예라고만 전해진다. 1914년 주암리로 개칭되었다.

오산

해발 120m 고려 명종 29년 1197년 보조국사가 잡은 터 라하며, 마을모양이 자라처럼 생겼다하여 자라오자 오산이라 불리다 1914년 오산리로 개칭되었다.

용지

해발 95m 1180년경 생겼다고 전해오나 1750년경 이천서씨가 정착하였으며 그 후 제주양씨 옥천 조씨가 들어왔다. 1914년 용지, 임촌, 용곡 3개 마을을 병합하여 용지마을로 개칭 되었다.

창촌

해발 90m 757년 경덕왕 16년에 부유현, 995년 승평군 부유현, 1036년 승평군 주암면으로 고쳐졌으며 구한말까지 현이나 면의 소재지 었다.. 창마을 창몰이라 불렸으나 1914년 개칭되었다.

천평

해발 90m 마을 형성 시기는 757년 부유현 때부터 이며 1200년경 보조국사가 마을 샘터를 잡아 주었다 하여 샘바대라 불리다 1914년 잿등과 천평을 합하여 천평리가 되었다.

복다

해발 110m 1580년경 연안 이 씨가 터를 잡았다 하며, 1914년 용강, 보령, 신기, 수평, 쌍산, 월평, 용촌과 행정, 문길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복다리라 부르고 있다.

용촌

해발 92m 1594년경에 충청북도에서 이주해온 전주이씨 이인하공이 터를 잡았다하며 마을의 산세가 용머리 형국이어서 용두라 불리다 1914년 용촌으로 개칭되었다.

월평

100m 1800년경 옥천 조씨 조광호 공이 터를 잡았다하며, 조선후기 전정제도에 의해 천자문 8번째 해당하는 원자와 들녘이라는 평자를 따서 월평. 말꼬리 형상이라 하여 ‘마미등’으로 불렸다.

문길

해발 92m 1500년경 여산 송 씨에 의하여 형성되었다. 중간에 남원양씨 옥천 조 씨가 들어와 살고 있다. 1914년 문길과 장동을 병합하여 풍교리라고 부르다 최근에 이르러 문길리로 개칭하였다.

요곡

해발 92m 1400년경 도강 김 씨가 터를 잡았다고 전한다. 1600년경 경주정씨가 들어와 그 후손들이 살고 있다. 역귀풀이 많아 여꾸실 요곡이라고 불렸다. 동네 입구는 200년 전 면서당이 있어 석당이라고 불린다.

선산

해발 85m 1450년경 도강김씨가 터를 잡았다고 전한다. 마을 뒤에 마늘 조각 같은 형상이라 하여 말매(마늘)라 하다가 이 산명에 따라 선산이라 칭하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구산

해발 70년 1447년 옥천 조씨 조지곤이 살았다하며 마을 전후좌우에서 보아도 거북 형상을 하고 있어 거그메라 부르다 일제시대에 일본왕 중에 귀산천황이 있었다 하여 이홉구자 구산으로 개칭되었다.

둔대

해발 80m 호암은 1230년경 둔대는 1280년경 옥천 조씨가 오원은 1924년 김씨가 터를 잡았다. 호랑이 형국이라하여 호암, 까마귀 형국이라 하여 오원, 고려말 군량미저장고 터라 하여 둔터라 불리다 둔대로 개칭되었다.

죽림

해발 64m1380년경 부정공 조유가 처음으로 마을을 이루었다하며, 처음엔 대숲골 1706년 겸천서원이 건립되면서 서원마을이라 하다가 조선중엽 죽림마을로 개칭하였다.

고산

해발 68m 1400년경 경주황씨가 터를 잡았다하나 실제 조선시대 경주정씨에 의해 마을을 형성하였다. 아미산줄기가 고리처럼 에워 싼다하여 고리메, 환곡으로 불리다 1914년 고산으로 개칭되었다.

문성

해발 115m 1700년경 옥천 조씨가 터를 잡았다. 아미산과 옥치재 계곡의 수정같은 물을 바라보며 학문연구에 좋은 곳이라 하여 서당골, 서당도으로 불리웠다. 그후 문장이 나는 곳이라하여 문자와 옥녀봉을 가리켜 성자를 넣어 문성동이라 하였다.

외광

해발 65m 1780년경 김해김씨가 터를 잡았다고 전한다. 처음에는 광청리라 불렸으나 보성강을 끼고 있어 광천리로 불렸다. 1914년 1.2.3구로 분할하면서 외광마을로 부르게 되었다.

내광

해발 70m 1430년경 김호스님이 자리를 잡았다 전한다. 처음에는 광청리라 불렸으나 보성강을 끼고 있어 광천리로 불렸다. 1914년 1. 2. 3. 구로 분할하면서 내광마을로 부르게 되었다.

원동

해발 70m 1730년경 전주이씨가 터를 잡았다고 전하나, 유물 유적으로 보면 그 이전에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덕양역에 속한 광천원이 있어 원골, 원동이라 불렸다.

비룡

해발 110-1143m 기룡은 순창옹씨가 월봉은 김해김씨가 1750년경 터를 잡았다고 전한다. 기룡은 점골로 월봉은 갈용. 가랭이. 신기는 샛터라 불렸다.

운룡

해발 100m 1380년경 옹씨가 터를 잡았다고 전한다. 용이 누워 있다하여 운와리라 하다가 후에 용이 등천하는 형국이라 하여 운룡리라 개칭하였다. 1983. 2.25일 석곡면에서 주암면으로 편입되었다.

용두

해발 190m 1600년경 진주 강씨가 임란을 피해 마을을 이뤘다고 전한다. 꼭두바우라 불리다가 운룡마을의 용이 머리를 향하고 있다하여 용두마을로 개칭하였다. 1983년 석곡면에서 주암면으로 편입되었다.

약촌

해발 71m 1600년경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그 전부터 터를 잡았다는 설도있다. 1854년 군수 신석희가 향약재를 건립하여 향약정이라 불리다 1914년 약촌이라 개칭하였다.

한곡

해발 85m 한곡은 1783년 옥천 조씨가, 유산은 1686년 경주정씨가 터를 잡았다고 전한다. 큰절이 있었다하여 대사동이라 불렀고, 그다음에는 주위 경치가 한가로워 한동이라 불렀다고 한다.

문천

해발 115m 무학은 1572년 옥천 조씨가, 문천은 1586년경 흥덕 장씨가 연동은 1586년경 광주 안씨가 터를 잡았다고 전한다. 양촌이라 불렸으며 조선조 때 역터가 있었다고 전한다.

백록

해발 110m 685년 가음현의 현령이 있었던 터이다. 마을 뒷산의 산세가 사슴처럼 생겼다고 하고 뒷산바위가 멀리서 보면 흰바위로 보여 흰사슴 마을이라 부르다가 백록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

가음

해발 110m 685년 가음현의 설치되었던 터로 고을터 이전에 마을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향교터와 가음현 당시 시장터였다고 전하는 구장터, 매화봉은 봉화를 올렸다하여 촛대봉으로 부른다.

대구

해발 105m 최초로 마을 터를 잡은 이는 알 수 없으나 박 씨와 김 씨 였다고 전한다. 1630년경 옥천 조씨가 새 거주지로 잡아 마을을 이루었다. 거북의 꼬리 터라 하여 한구미라 부르다 1914년 대구리로 개칭하였다.

궁각

해발 65m 궁각은 1486년에 양천 허 씨가 매우는 서시가 터를 잡았다고 전한다. 궁각은 활뿌리와 비슷하다 하여 활뿌리라 불렸으며, 소가 잠을 자는 형상이라 하여 매우라 하였으나 매우라 쓰고 있다.

마전

해발 66m 1686년경 양천 허 씨가 터를 잡았다고 전한다. 마을에 삼을 많이 심어 마포를 만드는 마을이라 하여 삼밭마을이라 부리다가 1914년 마전으로 개칭하였다. 1909년 석곡에서 주암으로 편입되었다

# 주석

1) 승평지: 1618년(광해군 10) 순천부사 이수광이 처음 편찬한 순천읍지로서 1729년(영조 5)에 《중간승평지(重刊昇平志)》(부사 홍중징), 1881년(고종 18)에 《순천속지(順天續誌)》(부사 김윤식)가 나왔다. 1923년 순천향교에서 위의 것들을 모두 묶어 《승평속지(昇平續誌)》4책을 간행하였으며, 1988년 순천대학 남도문화연구소에서 자료 총서로 영인한 바 있다.

2) 부유현: 현재의 순천시 주암면 창촌이 그 치소로서 조선시대에는 여기에 부유창이 있었다. 

3) 유총병: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군으로 온 명나라 장수 유정(劉綎)을 말한다. 총병은 그가 원군 왔을 당시의 계급명이다. 정유재란 말기인 1598년때 조명연합군 사령관으로 참전했던 그는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여 조선 측의 불만을 샀으며 뒤에 부유로 퇴각, 일시 그곳에 주둔한 일이 있었다.

4) 부정: 고려시대 사(司)ㆍ시(詩) 등이 붙은 관청에 두었던 정4품의 관직. 

5) 경태: 명 경제(景帝)의 연호이다. 사육신 사건이 일어난 해는 경태 7년(병자년), 즉 1456년(세조 2)인데 여기에서 ‘경태 6년’이라 한 것은 착오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