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띠여사 2011. 8. 20. 14:48

선생님이 자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군자 같은 유가 되고, 소인 같은 유가 되지 마라.

子謂子夏曰 女爲君子儒 無爲小人儒

                              - 논어 옹야편 11장

 

 

공자시대에 유(儒)는 직업군을 가르키는 말이라고 한다.([논어교양강의(돌베개)]에서 진신순(일본의 저명한 중국 역사 소설가))

논어는 유가의 경전인데 '儒'자는 옹야편 11장에만 딱 한 번 언급되는 것이 공자문인들이 자칭하는 말이 아니라 세간사람들의 타칭이라서 언급이 안되었다고 진단한다.

직업으로서의 '儒' 는 인생 전반에 대한 상담자로서 독특한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儒'는 예의범절의 선생으로 출현하기 때문에 확실히 의식에 어울리는 복장을 했다. 신사를 목표로 하므로 다툼등을 벌이지 않도록 헐렁헐렁한 옷을 걸치고 모자도 매우 큰 것을 썼다고 한다.

 

'儒'라는 문자는 후한 허신(許愼 30~124)의 [설문해자 說文解字]에 "유(柔), 술사를 칭한다"라고 되어 있고, 청나라 단옥재(段玉裁 1735~1815)에 따르면 '雨' 밑에 '而'가 있는데 이것은 아래로 늘어뜨린 수염이고, 뻣뻣한 것이 비에 젖어 부드러워진 것을 나타낸다고 한다.

 

그런데 금문(金文 청동기에 주조된 문자)의 '而'는 수염이 아니라 인간의 모습이며, 게다가 머리는 '一'로 편평하고, 이는 갓을 쓰고 잇지 않는 모습이므로 수형자나 특정한 직업을 가진 특이한 모습의 사람을 나타낸다고 한다. '需'에는 '바라다'라는 의미가 있고, 고대인이 생활에서 가장 절실히 바라던 것은 가뭄 때의 비일 것이며, 시가카와 스즈키는 이 글자를 '기우하는 무축(巫祝)'이라고 풀었다고 한다.

 

'유'의 원류를 따라 올라가면 '유'는 기우하는 무축인 듯하며, 그들은 당연히 의식을 중시했을 것이고 유자가 세간에서 의례의 전문가로 여겨진 데는 그러한 배경이 있다고 한다.

   - 이상 [논어교양강의] (진순신저 돌베게출판)에서 옮김.

 

주나라의 주공이 신정시대를 종식시키고 왕정시대를 열면서 제정한 예악을 예의 근본으로 추앙하고 '하은주시대'를 이상향으로 생각하는 공자는 자신의 직업이니 더욱 보수적으로 지키려 했던것이 '유'의 "예(禮)였을 것이다. 이런것들이 후세에 전하며 학문과 사상으로 발전해서 동북아를 지배, 지탱하는 유가사상이 되었을 것인데, 우리 조선의 선비(儒)들은 이 유가사상을 객관적 학문으로 만 받든것이 아니라 교조적 유일사상으로 주희의 성리학(가장 지배계급에 부합되는 사상)을 맹목적으로 따르다 보니 참람한 역사를 쓰게 된것은 아닐까? 지금 이시대에 길거리에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팻말을 든 정신이상자들과 다를게 무언가?

 

주희와는 다른 경전풀이를 했다는 이유로 사문난적으로 몰리고, 급기야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한 윤휴가 "나라에서 유학자를 쓰기 싫으면 안 쓰면 그만이지 죽일 것은 무엇인가." 경신환국(1680) 때 사약을 마시기 전 소주를 청해 마신 뒤 남겼다는 마지막 말이다. 학문이라는 것이 기초적인 것을 배우고 나면 자신만의 생각이 생겨나고 확립되어 가는 것 아니겠는가? 더구나 수학도 아니고 사상이면서 고문을 이해하는 것이 꼭 다식판에 다식 찍어내듯 다 똑같아야 하겠는가 말이다. 논어는 공자시대를 이해하기부터 시작하는 것일 것이다. 송대의 주희가 제아무리 출충하다고 해도 춘추시대를 살아낸 사람이었는가? 성리학은 이데올로기이다.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을 억압할 수 있게 하는 훌륭한 사상적 총칼이다.

 

송시열이 떠 받드는 공자님이 말씀하셨단다. 공자께서 송시열과 대화를 했다면 군자라 했을까, 아니면 소인배라 했을까? 송시열을 따르는 노론은 그를 송자(宋子)라고 성인의 반열에 올려 추앙하고 있다고 한다.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군자는 두루 어울리지만 떼거리 짓지 않고,

소인은 떼거리 짓지만 두루 어울리지 않는다.

子曰 君子周而不比 小人比而不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