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으로의 여행

기시노부스케와 박정희

소띠여사 2012. 11. 21. 14:19

기시노부스케와 박정희

        강상중, 현무암 지음. 이목 옮김. 책과함께.(2012)

 

일본에서는 전범이 청산되지 못한, 아니 안한 대가로 정치적으로는 후진국을 벗어나지 못하며,

반성없는 우익들이 판을 치는 통에 주변 피해 국가와 마찰을 빚고 있는 오늘의 현실.

우리나라에서는 친일파가 청산되지 못한, 아니 안한 대가로

5. 16구테타와 유신, 5공 독재에 이어 오늘날까지 보수를 가장한 그 자손들이 기득권을 틀어 쥔채

시민들을 압박하고 있는 현실.

1급전범에서 일본정치의 막후 실력자로 부활하여 그 손자(아베신조)까지 일본 정계 거물급으로서

과거 일제의 과오에 대한 반성이나 참회는 하지 않고 합리화시키고 있는 현실.

독립군을 잡으러 다닌 만주국군 다카키 마사오의 친일이 청산되지 못하고

6.25 동존상잔의 피흘림을 발판으로 부활한 박정희는

그의 딸이 아버지의 독재정치 자산을 발판으로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현실.  

 

박정희씨는 자신의 친일경력이나 남로당 경력을 참회와 반성도 하지않고

오로지 자신의 영구집권을 위해 친일부역자들을 중용해서 정치동반자로 삼았다는 사실을 나는 알지 못했다.

어디 내가 알지 못하는게 한 두 가지일까?

청소년기 학생 때는 더더욱 진실이 호도되는 세상에서 살았었었다.

한국적 민주주의가 최고의 민주주의인줄 알았었다.

힘있는 사람들이 휘두르는 폭력이 법의 다른 이름인줄 알았었다.

 

중 1때의 기억, 

동그라미 밑에 투표하자는 표어가 복도 곳곳에 붙어 있었던걸 기억한다.

난 그래서 74년도에 10월 유신이 선포된 줄 알았었다.

그런데 10월유신은 72년도에 만들어 졌다고 해서

그시절 모든 벽면에 명화처럼 붙어 있었던 반공 표어를 밀어내고 붙여 졌던

그 표어에 대한 또렷한 기억에 대해 몹시 의아해 했었다.

친구들 몇몇에게 물어도 자신들은 기억하지 못한단다.

난 또렷이 기억하는데....

내 기억의 표어 붙임이 확실히 존재했었다는 걸 뒷받침하는 또 다른 기억.

1학년 담임선생님께서 하셨던 말씀.

"니네 부모들은 무식해서 왜 동그라미 밑에 영표를 찍으라는데 그걸 못알아 듣니?"

"집에가서 니들 부모님께 제발 말 좀 잘해라.

 내가 그런것까지 알려주러 일과 끝나고 저녁까지 동네동네 찾아다니며 니들 부모들까지 가르쳐야 하겠니?"

 

난,

우리 부모님은 글도 잘 읽고 미련하지 않으며, 세상 물정을 모두 알고 있으실 것인데

우리 부모님을 미련한 곰탱이 취급을 하신 선생님 생각이 틀렸고

잘 알아서 동그라미 든 가위표든 선택하실 것이니 걱정마시라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도저히 선생님 기에 눌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쓰린 기억.

 

'구국의 결단', '두개의 판결' 등등을 들며 과거 폭압의 시대를 정당화 하려하는

박근혜씨의 반성없는 발언들을 들으며 유신에 대해 검색을 해 보며 알게 된 역사로서

내가 담임선생에게서 심한 모욕감을 느꼈던 그 종례시간의 기억이 

유신과 박정희에 대한 재신임 국민투표(1975. 2. 12. 79.8%투표참여, 73.1%찬성)의 찬성을 

공권력을 동원해 독려한 역사적 현장이었었다.

 

지극히 정치적 중립에 서 있어야 할 교사들까지 동원되던 한국적 민주주의의 시대.

권력자의 폭력에 맞서기보다 순응하는 대신 아래로 폭력을 아무거리낌 없이 행사하던 야만의 시대.

그 시대에 학창시절을 보낸 나는 그게 민주사회인 줄 알았었다.

그것이 21세기를 이끌어갈 인재를 양성(그 시절 교감선생님의 단골 훈화 멘트)하는 교육인 줄 알았었다.

 

중 3때 그 선생이 우리에게 휘두른 폭력의 상처는 아직도 내 가슴에 치유되지 못하고 세겨져 있다.

그녀가 우리들에게 폭력을 휘두르게 했던 원인은 우리들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우리도 알았고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정치적 도구로 이용되는 걸 아무 생각 없이 받아 들이고 순응했듯이

힘있는 남자 선생에게 무릎을 꿇고 대신 그 분노를 우리에게 발산했었다.

 

사춘기 여학생과 남선생의 부적절한 사건이 그 여름에 알려졌었다.

우리 여학생들은 수근댔고 고름이 터져 그 남선생이 우리의 곁을 떠나 주길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바람대로 그 사건은 흘러가지 않았다.

그 남선생은 자신의 과오를 생쇼로 극복하였다.

우리의 담임인 그녀는 기꺼이 그리고 철저히 그 남선생의 쇼에 동참해 주었다.

 

어느 여름날 조용한 수업시간에 옆 4반 남학생 교실에서

괴상한 고성과 함께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정적을 깼다.

쉬는 시간에 그 괴상한 소리의 주인공이 그 남선생이었다는 걸 알게 된 우리는

그가  그 사건을 타계하기 위해 쇼를 한다고 비웃었었다.

며칠 후 우리 교실에서 그의 그 쇼가 재현되었다.

 

2교시 수업 시작 시간.

늘 예나 지금이나 그렇듯 사춘기 애들은 부산스럽다.

우린 정숙하게 앉아 그의 수업을 듣기 위해 정좌하고 앉아 있지 않았었다.

그게 그날 하루만의 일은 아니었었다.

우린 늘 그랬었다.

그래도 그가 5분드라마(수업과 관계없는 잡다한 이야기)를 40분드라마로 수업을 때울 때일지라도

수업 시작 전의 그 부산스러움은 늘상 차분하게 가라앉았었다.

늘 그랬었다.

그가 괴성을 지르고, 출석부를 던지고, 교탁을 엎어 버릴 정도로 분노하게 할 만큼의

그 어떤 특별함이 그날 없었었다.

 

그의 쇼를 부른 이유가 내 짝과 또 다른 친구인 두명의 아이가

수업시작종이 울렸음에도 불구하고 도시락을 까먹었었기 때문이란다.

김치냄새가 심하게 난 교실에서 도저히 수업을 할 수 없어서 그 쇼를 했었다는 걸

우린 담임인 그녀를 통해 알게되었다.

그가 괴성을 바락바락 지르며 쇼를 할 때 막연히

'코너에 몰린 자신의 부끄러움을 저런식으로 표출하는구나'하는 생각을 하며

우린 빤히 눈을 뜨고 지켜만 보았었다.

그런데 난 내 짝이 도시락을 까먹었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그 때도 그랬었고 지금도 그렇다.

어처구니 없는 트집이었고,

설상 그렇다 할 지라도 그는 우리들에게 그런 폭력을 휘두를 입장이 아니었다는 걸

우리 담임인 그녀가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에게 맞서길 포기하고 그 분노를 아래로 표출했었다.

도시락을 까먹었다고 지목된 두명의 학생을 불러내어 실신할 때까지 두들겨 패 댔다.

우리반 전체 아이들은 감히 그 폭력에 맞서지 못하고 육체가 아닌 마음을 두들겨 맞았다.

그 상처는 아직도 내 가슴에 세겨져 있어서 이 일을 생각해 낼 때마다 아프다.

친구가 실신하는 데도 그 이유없는 폭력에 대항하지 못했던 못난 나를 질책하며 아프다.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인 내 자신의 부끄러움 때문에 더욱 아프다.

내 짝을 졸업 후 한 번도 만나지 못해 그때 같이 맞서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했다고 사과하지 못해서 아프다.

이젠 이 세상에서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되어 사과할 수도 없어 더더욱 아프다.

 

 

일제로부터 해방이되어 주권국가의 당당한 시민이라고 믿었던 나의 생각이 틀렸음을 이책은 말해준다.

그 10월유신의 시대에 청소년기를 보내며 

한국적 민주주의와 보편적 민주주의를 구별하지 못한(그렇게 교육받은) 나는

일제의 분신, 일제의 또다른 이름인 만주국에 뿌리를 둔 사람들이 통치하는

또 다른 형태의 식민 시민일 수도 있었다는 걸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자신의 권력과 권위를 내세워 소위 아랫사람들을 억압 할 수 있었던

10월유신의 시대에는 '일인지하 만인천상'의 봉건적 이데올로기의 폭력이 곳곳에서 자행되었던 시기였었던 것같다.

부당함에 대한 항거 대신 순응, 그리고 아래로 내리 쏟는 폭압의 연결고리들.

나는 청소년기에 겪은 '10월유신의 새끼 폭력'으로 인해

교사에 대한 불신이 지금 나의 무의식 속에 깔려 있음을 문득문득 발견한다.

 

5. 16과 10월유신을 구국의 결단이었다고 정당화하는 박근혜씨.

나의 중 1과 중 3때 담임이었던 그녀는 그 때 그 일들을 뭐라고 말할까?

내가 아직도 그녀에게서 받은 폭력의 상처때문에 아파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이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