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쨋날 이야기
기상 콜을 받고 뒤척이다 일어나 시계를 찾으니 방 어디에도 시계는 없다.
눈 뜨자마자 시계부터 보는 습관인 내게는 지금 몇시인가 무척 궁금했다.
시간을 알아보고자 플론트의 안내원에게 "what time is it now"라고
남편이 정중히 물어도 묵묵부답,
내가 손가락으로 시(時)를 써도 묵묵부답 손으로 로비만 가르킨다.
그 호텔에는 우리의 눈에 보이는 시계는 찾을 수 없었다.
다음날 남편이 손목의 옷깃을 들어 올렸더니
아하! 어느 외진 곳에 걸려 있는 시계를 가르키더란다.
역시 바디랭귀지는 만국의 공통어이다.
그 흔한 탁상시계가 왜 없을까 무척 궁금하여 가이드에게 물었더니
그곳 사람들은 시간에 그다지 메이지를 않는단다.
한국사람들 처럼 시계가 가르키는 시간에 메어 살일이 없으니 시계가 필요치 않다고 한다.
그래선지 끼니를 때우러 들어간 식당에서도 벽에 시계가 걸려있는걸 볼 수 없었다.
나는 오만데가 널려있는게 시계여서 손목시계를 굳이 차지 않아도 시간을 알수 있어
시계를 착용하지 않는데 반하여
그곳의 사람들은 시계에 얽메어 살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살아서
굳이 시계를 곁에 둘 필요가 없다니 .....
누가 누구를 불편해하거나 불쌍(?)하다 할까?
옆자리에서 혼자앉아 식사를 하는 아주머니께서
느끼하게만 느껴지는 음식을 밥도 없이 드시길래
음식을 잘 못 선택해서 고생하시는 가봐, 김치을 권했더니 도리질을 치신다.
어떻게 드실까 걱정이 되었다.
그래도 그걸 다 드신다.
그분도 식사가 끝나고 코를 푸신다.
어떤 아주머니가 중국말로 아는 체를 하신다.
옆 아주머니 중국말로 대꾸를 하신다.
으악! 꽈당이다.
우리의 김치냄새가 역겨웠을 수도 있겠다 싶어
코를 푼 행위를 비난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억지로 그들의 문화려니 하고 이해하고자 한다.
장가계(張家界) 관광을 시작한다.
중국의 23개 성 중 호남성에 속한 장가계는
대용시라는 명칭으로 불리다가 장가계로 개칭을 했다고 한다.
장가계의 유래는 후삼국을 통일하고 한나라를 세운
한고조 유방이 의심이 많아
같이 싸운 장수들의 반란을 몹시 두려워 했단다.
유방의 장수 중 한신이라는 사람이
유방의 의도를 알고 자신의 수하인 장량에게
'토끼 사냥이 끝난 뒤 사냥개는 가마솥으로 가고, 새 사냥이 끝난 뒤 화살을 화살촉만 취한다'
라는 말로 자신의 처지를 암시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장량이 식솔들을 거느리고 도망하여
이곳에 숨어들어 장량의 나라를 일궜다 해서 장가계라는 이름을 붙였다 한다.
설명을 듣자하니
우리 정치권에서 심심치 않게 써먹는 사자성어
'토사구팽(兎死拘烹)'의 본고장에서
한자어 한마디 하지 않고 우리말로 풀어서 설명하는 가이드와 만났다.
장가계는 남방 아열대 기후이고 년 간 200일이 비가 내리며,
연평균 기온이 16-17도 라고 한다.
장가계의 비경이 알려지게 된 계기가 화가 황영옥의 그림을 통해서 라고한다.
장가계를 그린 황영옥의 산수화가
너무 절경이어서 사람들이 상상속의 풍경이라고 그림으로 치지 않으니
황영옥이 사람들에게 이곳 장가계를 소개해서 알려졌으며,
1982년 첫 중국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1992년 세계 자연유산에 등록이 되었다고 한다.
외국 관광객에게 개방 한것은 몇년이 안되었으며
한국관광객에게 먼저 개방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곳곳에 한글로 쓰여진 간판이며 설명문이 보였다.
160만 인구 중 소수민족이 70%를 차지하고
그중 제일 많은 소수민족은 90만 명인 '토가족(土家族)'이란다.
토가족은 언어는 있으나 문자는 없다는 설명 속에서
중국 속의 소수민족인 재중교포 3세인 가이드의
우리문자가 있음에 대한 자부심을 엿 볼 수 있었다.
그 다음으로 바이족, 묘족 순으로 인구 분포를 이룬다고 한다.
토가족은 중국의 해방 후 60년대까지도
악명을 높였던 최후의 산적으로 칭해지던 민족이라는 설명이 덫 붙는다.
하늘을 찌를 듯한 험준한 산악지대로 형성된 장가계 일원은
원숭이, 범, 늑대, 독성이 아주 강한 오보사(물리면 다섯걸음을 걷기전에 죽는 다 하여 붙여진 이름)를 비롯한 많은 독사들이 산다고 한다.
현재도 고산지대에 살면서 약초나 나물등을 채취하며
옛 방식대로 사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토가족의 문화중에 '울음침대'라는게 있는데,
결혼할 처녀가 마련한 침대로
한달동안 이 침대에서 부모와의 이별을 슬퍼하며 울어야 결혼을 할 수 있다한다.
울어서 눈이 많이 부은 처녀 일 수록 효도하는 진정한 마음을 확인받는다고 한다.
토가족 총각이 길을 가다 마주친 처녀의 발등을 밟고 노래를 한곡하면,
처녀의 의향에 따라 답가를 처녀가 부른단다.
총각이 다시 보아 마음에 들면
또 노래를 한곡 주고 받는 걸 서너차례 반복하면
허혼을 하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실수로 마음에 없는 처녀의 발등을 밟아서 혼사를 하고 싶지 않으면,
일년 동안 처녀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든지
아니면 황소 한마리를 주어야 한단다.
다른 것은 몰라도 결혼 풍습만은 여권이 강했었나보다.
우리들이 남편들에게 농담으로 토가족 쳐녀를 조심하라고 일렀다.
남편들은 토가족 처녀가 보이기만 하면 쫓아가 발등을 밟겠단다.
질투하는 척 한국으로 데려가 구박구박 하겠노라고 농을 되받으며 여흥을 돋궈본다.
기암괴석이라고 했던가?
원가계와 첫 대면한 우리는 절경의 산수화 병풍을 보았다.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옛 선인들이 그렸던 산수화 속으로 내가 들어간 듯이 느껴졌다.
그림밖에서 그림속을 들여다보고
상상의 풍경일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생각들이 무너졌다.
나와 친구들이 그림속의 사람들이 되었다.
도저히 내 글솜씨 말솜씨로는 표현이 불가능하다.
중국식 표현으로 '천대서해'라 한단다.
비온 뒤 운해가 깔리면 바다와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바위 젓가락을 쑥쑥 꽂아 놓은듯
수정조각이 물을 먹고 쑥쑥 커진듯
모든 바위산이 따로 또는 쌍쌍이
너도 나도 구름을 뚫고 서서 하늘로 향하고 있었다.
직벽의 바위 나락에 326M의 엘리베이터를 건설하여
원가계를 구경할 수 있도록 하였다.
프랑스에서 건설하여 70년간 임대운영하다가 중국에 넘겨줄거란다.
구경하는 우리는 좋지만, 회손되지 않을까하는 걱정도 된다.
중국만의 것이 아닌 세계인의 보물이 되어야 할 것이다.
전날 비가 온 덕에
원가계 바위산들이 비안개와 구름에 둥둥떠 있었다.
이런걸 장관이라고 하나보다.
천생교는 357M 높이에서 바위가 다리모양으로 이어져 있는데
이곳에서 자물통에 소원을 세기고
난간에 자물통을 걸어놓고 잠근 열쇠를 아래 계곡으로 던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있단다.
수많은 자물통들이 각자의 소원들을 세기고 주렁주렁 메달려 있었다.
우리네 명산에를 가면 꼭 만나게 되는 폭포가 이곳 원가계에는 없는듯하다
백장절벽에 백장폭포라하여
장관을 이루리라는 기대를 했었건만
물줄기가 너무 작아서 그냥 물안개가 뿌려지듯 물이 날리고 있었다.
아무리 크고 웅장하다하여도
우리산하의 아기자기하고 있을건 다 있는 아름다움과 비교가 된다.
원가계 절벽들을 구경하고 나니
그 높은 곳에 어떻게 왔나 싶게 버스들이 우리를 기다린다.
반대편으로 도로가 나 있어서 관광버스들이 그 고산에 올라올 수 있단다.
40여분을 차로 이동하여 하룡공원에 다다랐다.
1896년 생인 하룡장군이 1920년대 초기에 혁명에 참가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는데,
문화혁명때 비참한 말로를 겪었다고 하는 가이드의 아쉬움에 찬 설명도 곁들인다.
공원에 우뚝 서 있는 은목서 한그루를 만났다. 무척 반가웠다.
은목서의 고향이 중국인지 한국인지 일본인지는 몰라도
순천에서 많이 보고 그향기에 순천을 떠올리는 나는
중국땅에서 본 은목서가 순천에서 온듯한 착각에 무척 반가웠다.
어마어마하게 큰 공산주의자 하룡장군의 동상과
하룡장군의 혁명때 쓴 탱크를 분해하는 모습들....
공산국가를 관광하는 자유민주국가의 우리들....
20세기 후반의 내가 21세기 초에 20세기 초를 만났다.
머릿속의 생각들이 분해되어 조각이 어지럽게 떠 다닌다. 정리가 되지 않는다.
어디선가 높은 음의 청아한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아마도 테이프를 틀어 놓은 것이리라.
특색이 있는 중국노래, 외국인이 오가는 길목에 틀어놓는 중국노래.
순간 우리네는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한번 들으면 한국의 노래라고 곧 생각할 수 있도록 하는
특색이 있는 노래가 있을까를 생각했다. 떠오르질 않는다. 또 기가 죽는다.
흥겨운 노래를 듣고 들으니 가락이 귀에 많이 익다.
내가 중국노래가락을 아는게 있던가?
분명 노랫말을 중국말인데 가락이 우리가 많이 듣던 가락이다.
우리민요 '닐리리아'를 중국식으로 부르고 있었다.
뱃속에서 나오는 소리를 목청으로 전달하여 부르는 우리의 노래를
높은 음으로 혀끝에 굴려서 부르고 있었다.
우리네 노래를 중국화해서 듣는 순간 중국노래인듯 착각하였다.
창법이 틀리는 것을 순간 우리의 노래가 어떤것인가 의문하다니...다시 기가 산다.
차일을 쳐놓고 관객석에 긴 의자까지 갖춰져 있는 공연장(?)을 지난다.
테이프에 녹음된 노랫소리가 아니라
진짜 라이브 음악공연이었다.
화려하게 중국전통 복장으로 차려입은 아가씨들이 '한국노래 천원, 천원'을 외치며
아리랑, 닐리리야, 그밖의 흘러간 우리네 유행가들을 부르고 있었다.
중국 특유의 톤으로 부르는 닐리리야가 새롭게 느껴졌다.
아주 누추하게 보이는 여자노인분이 의자에 앉아 누더기 이불을 덮고 있는게
화려한 중국전통복장의 아가씨들과 대조를 보인다.
관광객들에게 일부러 빈티를 보여주는게 이상하여
가이드에게 물었지만 모른단다.
아마도 어떤 자기들 나름대로의 뜻이 있을것이다.
천자산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원가계를 구경하며 하산을 했다.
이 케이블카는 스위스에서 건설해서 50년 동안 임대운영하다가
중국에 반환한다고 한다.
중국의 느긋함과 수많은 자원과 저력앞에서 저절로 탄서이 나왔으며
살살 배가 아파옴도 느낀다. 난 분명한 한국인-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이다.
정말 부럽다. 우리네 산천에 이만한 곳이 있는가를 열심히 머리굴려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통일만이 살길이고 열려있는 길이라 싶다.
보봉호수를 구경하러 이동했다.
원가계의 계곡에 앝은 호수가 형성되어 있던것을 민자를 유치하여
인공호수와 폭포를 만들었단다.
벗꽃도 피어있고, 목련과 유채꽃도 볼 수 있었다.
얼마 안있어 우리 순천에도 이러한 꽃들로 넘쳐나리라.
이국에서 보는 친근한 꽃이 새롭다.
호수에 배를 띄워 뱃놀이를 했는데
이쪽 저쪽 골짜기에서 여자, 남자 가수가 나와서 노래를 불렀다.
여자가수의 꾀꼬리 노랫소리며, 남자가수의 우렁찬 노랫소리가 좋았다.
뱃놀이 하는 관광객도 답가로 노래를 불러야 한단다.
우리 순천팀 가수는 세명이 나서서 불렀고,
양반골 안동팀 가수는 두명이 나서서 불렀다.
양반골 안동에서 왔노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50대 남자분이
'돌아와요 부산항'을 일본말로 부르는 것이었다.
하필 동네 노래방도 아닌데 그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면서
그것도 남의 나라까지와서 '일본말'로 우리의 노래를 불러야 했나?
낯 뜨겁고 부끄럽다. 역사는 우리만 아는 것이 아니라
배를 젓는 사공도, 우리를 안내하는 보봉호수의 가이드도,
조선민족이라는 자긍심이 대단한 가이드도 안다.
그들은 지난 역사를 잊지 않았다. 양반골 안동아저씨만 잊었다. 아니 잊고싶었을게다.
호수의 수심이 제일 깊은곳은 '성문인빈'이라는 곳인데 119.2M이란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아기고기'라는 물고기가 산다고 한다.
발이 4개가 달렸으며, 짝짓기를 하면서 우는 소리를 본따 '와와어'라 부르기도 한단다.
짝짓기는 육상에서 하며, 수명이 120년에 이른단다.
아기고기 한젓가락에 10년을 장수한다는 속설이 있어,
중국의 호사가들은 아기고기 3젓가락을 먹는게 소원이라고 한다.
좋은 경치에 호수를 만들고 밋밋할 것 같은 뱃놀이에 노래를 부르게 하므로써
적절하게 포장을 한 관광상품-놀랍다. 그냥 놀라울 따름이다.
가는 곳 마다
지심지문 용왕동(地心地門 龍王洞)
이런 문구가 씌여져 있는게 몹시 궁금하였다.
'토사구팽'의 사자성어의 고장이라서
이 문구도 심오한 어떤 뜻이 있는 사자성어이리라고 짐작하였다.
지심지문이 무슨뜻을 지녔냐고 물어도 모른단다.
우리가 발음하는 지심지문을 몰랐다.
보봉호수를 안내하는 예쁜 아가씨 가이드에게 남편이 필담을 했다.
온통 북경시내 간판마다 붙어있던 중심(中心), 지심지문(地心地門) 등등
중심은 우리들이 흔히 쓰는 쎈타의 뜻으로 그냥 큰 가게정도란다.
우리는 쎈타라는 말은 공공적인 곳에 쓰는데 그들은 큰 가게정도에 붙인단다.
지심지문은 사자성어가 아니라 용왕동이라는 석회동굴을 수식하기위한 글이라고 한다.
이젠 가이드 아가씨가 의문이란다.
자기네 글을 이렇게 많이 아는 사람이 왜 말을 못하냔다.
뭐 하는 사람이냔다.
남편의 직업과 우리도 한자문화권이어서 한자를 공부한다고 일러줬다.
다만 우리는 뜻과 음을 분리해서 한글자에 한음만을 발음한다고 알고있는 만큼만 일러줬다.
귀가 따갑게 불러대던 아줌마소리가
'사모님'으로 바뀌었다.
신기하게도 가이드 아가씨가 나를 '사모님'이라고 호칭한다.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오간다.
우리가 이곳에와서 저들에게 돈을 정말 물쓰듯 쓰는데-천원짜리를-
이곳 저곳에서 아줌마 아줌마을 외쳐댄다.
발음하기 좋아서일까?
누군가 사모님 대신 아줌마만을 가르쳐 줬나?
우리끼리 그냥 무심히 부르는 아줌마를 얻어 들었나?
아닌것 같다. 분명 저들이 '아줌마'라고 아귀아귀 부르는 것은
'아줌마'의 뜻을 정확히 아는 사람이 전달해 줬으며
전달자나 불러대는 그들이나
가슴속에 꼿꼿하게 숨어있는 대국, 대륙의식이 있기때문인것 같다.
이런 생각은 여행코스로 들어있는
발 맛사지를 받으면서도 분명 느낄 수 있었다.
바디랭귀지, 필담을 석어서 '아줌마'를 '사모님'으로 개칭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내가 물건을 사주어서, 관광비를 내서, 팁을 주어서
우월의식으로 '사모님'소리를 듣고 싶어 한건 절대 아니다.
손님으로서 대접받고 싶었다.
우리네 정서로 다분히 반가운 손님으로 대접받고 싶었다.
'아줌마'와 '사모님'은 민족의식의 충돌이었다. 내 생각이다.
그래도 대륙민족이라는 자부심과
경제적으로나 그 무엇으로도 이젠 꿀리지 않는다는 대한민족의 자존심 대결인듯 싶었다.
아직도 '아줌마'소리가 역겹다.
그들이 내 생각을 알까?
아니면 내 생각을 알면 그들의 심중이라고 더 고소해 할까?
다시 또 다시 생각해도 난 '극우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