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으로의 여행

흑산 - 김훈

소띠여사 2011. 11. 17. 14:56

 

 

흑산 (김훈 장편소설, 출판 학고재, 2011.10.)

 

소설가 김훈의 [칼의 노래] [남한산성]을 읽으며

그의 냉정하고, 매몰차고, 정말 칼날처럼 섬뜩거리는 문장속에서도

따뜻함이 묻어나는 말들에 매료되었었다.

이 책을 읽기 전 우연히

모 신문에서 어떤 글조각을 읽다가 김훈이 신문사를 그만두게 된 이유 한토막이 무척 궁금하여

컴퓨터 검색을 해 본게 화근이 되어 이책을 읽으며 김훈의 이야기에 흠뻑 빠져 들 수 없게 하였다.

조선일보 논설이(그가 한 인터뷰 싯점에서) 정부를 까대는 게 좋아서 조선일보를 좋아한다고?

노동자들을 리얼하게 찍은 판화를 예술로 이해할 수 없다고?

여성은 남성의 보호를 받아야만 한다고? 

 

소설이 허구라하지만 모든것이 허구는 아닐진데,

허구의 이야기를 가장하지만 그속에 작가 자신이 추구하는 이념을 분명 녹여 놓았을 것인데,

정녕 그는 늘 자신의 작품속에서 자신이 빚어낸 민초들의 아픔을 같이하는게 아니라

내려다보고 즐겼다는 것인가?

이러한 물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내 머릿속을 빙빙 돌리다보니

이 작품을 읽으며

작품 속에서 살다간 수많은 민초들,

이 세상을 분명히 살다간 역사밖의 민초들이 부끄러웠다.

핍박받는 삶도 삶이라고,

아무생각없이 흘레붙어서 자손을 대를 물려 이땅에 싸질러 놓는 무지가 부끄러웠다.

그들이 나여서 부끄럽다.

내 늘어진 가슴과 처져서 울뚱불뚱하게 나온 배와 힘없이 삐져나오는 비겟덩어리들을

날것 그대로 내려다 보고 있는듯하여 수치심을 느낀다.

 

허구의 이름들을 빌려와 묘사한 여러 민초들을 엮어내는 말들에서 그들의 삶을 경멸하는 듯하였다.

자신의 삶과는 절대 섞일 수 없는 저 밑 사람들의 악다구니에 까딱하면 섞여들까봐 경계를 긋는듯 하였다.

이 작품 속에서 위악이라는 단어 속의 악은 악이 아니라 악인척 하는 것이라고 했던가?

자신을 변호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름없이 왔다가 간 여러 민초들의 삶을 꼭 동물들의 삶처럼 묘사한 말들로 인해

이 김훈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소설을 돈주고 사서 읽는 나를 조롱하고 경멸하는 말들이 아닌가하여

심히 불편했다.

나 또한 이세대를 지나 다음 세대가 기억할 때는 마노리, 순매, 아리 등등이거나

그어미와 아비이거나 그 자식들이거나 할 것일진대....

 

소설 속 황사영이 아니라 역사 속 황사영은 무엇을 위해서 서쪽에서 오는 함대를 갈망했을까?

천주님, 하나님, 야소, 예수 등이 자유로이 이시대를 점령한 지금도

민초들은 형이하학적 삶에서 그가 추구한 형이상학적 삶으로 옮겨 갈 수 없는데....

그시대나 지금의 시대나 말들로 현혹하는 사람들이 말없이 살아내는 사람들을 늘 지배하나보다.

 

사족을 붙이자면 늘 나는 궁금하다.

이 소설 속에 나오는 순매는 행복했을까? 불행했을까? 무엇때문에?

진짜 삶을 산 정약용의 강진유배지 첩은 행복했을까? 불행했을까? 무엇때문에?

소설 속의 정약전은 순매을 지아비로서 사랑했을까? 그냥 수컷의 본능으로 갈구했을까?

역사 속의 정약전과 정약용은 유배지의 첩을 지아비로서 사랑했을까? 그냥 수컷의 본능으로 갈구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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