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으로의 여행

고수와의 추억을 회상하다.

소띠여사 2007. 5. 16. 16:23

늘씬한 몸매로 가꿔보자고 맘 먹고 시작한 스쿼시가 영 시원치가 않다.

내가 열성을 못 내는 것과 더불어 운동에 소질이 없어서 인지 폼도 안잡히고 날아오는 공을 잘 쳐내지도 못한다. 그래서 남편 이외의 사람들과는 같이 어울리기가 쑥쓰러워 남편의 등뒤에 숨어서 살짝 땀만내고 오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남들은 4개월 정도의 구력이면 펄펄 난다는데, 나는 5개월째인데도 불구하고 만년 초보이다.

 

어제는 남편의 늦은 귀가로 나 혼자서 운동을 갔다.

제일 구석진 코트에서 혼자 잘 맞지도 않는 공과 30여분을 씨름을 하고나니 팔도 아프고 흥미도 잃어갈 즈음에 일전에 나랑 소띠동갑이라고 인사한 남자회원분이 같이 한게임하자고 하시며 코트에 들어선다. 정말 나는 실력이 모자라서 못하노라고 사양을 했는데 굳이 같이 치시겠단다.

 

용기를 내어 공을 주고받고 하니 천장을 치면서 춤을 추는 공과 날라오는 공을 못잡아 바닥에 뒹구는 공을 보면서 무지 미안하여 몸둘바를 모르겠는데 그분이 정식게임을 하자고 하신다.

내가 흥미를 잃지 않도록 배려하면서 적당히 져주시고, 적당히 이곳저곳에 공을 날려주시고, 아주 재미있는 운동시간을 만들어 주셨다. 정말 고수는 다르다. 마음속으로 무한히 감사하며 옛일을 떠올린다.

 

밤마다 처녀 총각이 마루에 걸터앉아 바둑을 두었었다.

정말 그때는 누워서 천정을 보면 바둑알들이 천정에서 쫙 펼져질 정도로 바둑에 심취했었다. 약간만 노력하면 그를 보기좋게 이길 수 있으리라. 끙끙대며 3판 2선승에 목을 달았다. 가까스로 이기거나 지거나... 그 약간에 목말라서 얼마나 가슴졸이며 안달했던가. 퇴근하고 저녁먹고 바둑을 둘 시간이 하루 중에 제일 기다려지는 시간이었다. 난 정말 그를 몇 수만 넘어서면 이길 줄 알았다.

 

난 내가 그보다 더 어른스러운 줄 알았다. 내가 먼저 사회물을 먹었으니 나이는 내가 아래여도 내가 누나라고 박박우기며 어른행세를 했었다.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 내가 그보다 훨씬 어린애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와 고만고만 꽁수 20급바둑쟁이 인줄로 알았던 그가 아마5급의 고수였던것을 먼 훗날 알게되었다. 그 사실을 알고나서 쑥쓰러워서 우리의 저녁 바둑파티는 끝났고  그의 어른스러운 배려에 대해 고맙다고 인사도 아직까지 못했다.

 

그때는 요즘 시쳇말로 쪽 팔렸었다.

끙끙대며 한 수를 이겨보겠다고 물러달라고 떼를 썼었고,

오늘은 꼭 이기리라는 확신에 바둑판을 깔아놓고 어서오라고 덤볐었고,

어쩌다 한 판을 이기면 득의양양해서 우쭐댔었고,

더더욱 나는 만년 20급 꽁수였으니 그 부끄러움이라니.....

바둑을 두지 않으니 우리사이도 소원해졌고,

그리고 그러다 헤어졌다.

 

그 뒤로 가끔 난 그를 생각한다.

고수의 어른스러운 배려를 받을 때,

남편이 내게 져 주지 않고 바득바득 나를 이겨버릴 때,

"첫사랑 생각하니?"라고 남편의 놀림을 받았을 때.

 

그도 하수의 멋모르는 날뜀을 볼 때 나를 생각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