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관람기
<목 차> 1. 머리말 1 2.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줄거리 1 3.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보고 느낀 점 2 4. 맺음말 4 |
1. 머리말
여가와 삶의 과제물을 받고 오랜만에 영화를 볼 수 있는 호사를 누렸다. 요즘 상영하는 영화중에 무슨 영화를 선택해야 할지 몰라 인터넷을 검색하던 중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소개말을 보고 이 영화를 선택하기로 했다. 공지영 씨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것이라고 해서 먼저 원작을 읽기로 했다. 책을 사러 서점에를 가고, 아주 편하게 배를 깔고 누워서 책을 읽고, 깊은 밤 옆에서 자는 남편이 잠을 깰까봐 소리죽여 울고 했던 이 시간들에 이름을 붙이자면 ‘나의 행복한 시간’이었다.
토요일(06. 9. 23) 이른 저녁을 먹고 남편과 같이 영화를 관람하러 순천 프리머스 영화관에 갔다. 강동원과 이나영이 주연이라서 20대의 여자 관객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영화표를 예매를 하지 않았어도 볼 수 있을 만큼 관객이 몰리지는 않았다.
영화가 중간쯤에 이르자 여기저기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마지막 부분에 이르자 극장 안이 울음바다가 되었다. TV연속극을 보고도 눈물을 자주 훔치는 남편도 훌쩍거리고 눈물을 훔쳤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많이 울기도 했거니와 과제물을 작성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영화에 몰입할 수 없었는데, 이로 인해 극장안의 관객들과 같이 호응할 수 없어서 한편 안타까웠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원작과 영화의 줄거리를 간략해 보고, 내가 느낀 점을 서술해 보기로 하겠다.
2.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줄거리
사형수 윤수(강동원 분)와 대학교수 유정(이나영 분)의 사랑이야기이다. 그냥 단순한 남녀의 사랑이야기가 아니라 죽고 싶어 안달할 정도로 자신을 학대하는 두 사람이 자신과 상대와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터득해 가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유정은 겉으로 보기에는 남부러울 것이 없는 완벽한 인생이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의 유복한 환경, 검사와 의사로 성공한 오빠들, 그리고 인텔리 엄마와 수녀고모님 같은 가족에서부터 자신은 프랑스 유학파에 대학 강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으며 미모의 커리어우먼이다. 그런데 세 번씩이나 자살을 시도한 경력의 소유자이다. 유정 또한 어린 시절의 폭력으로 삶이 뒤틀린 사람이다. 사촌오빠에게 성폭행을 당했는데, 큰아버지의 도움이 없으면 아버지의 사업이 어려울 것이라는 핑계로 엄마는 유정의 행실머리가 나빠서 생긴 일이라고 유정에게 도움의 손길을 거두어 버린다. 그날까지 전지전능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신도 유정에게 도움의 손길을 보내지 않았다. 유정은 폭력행사자 보다도 그 폭력에 고개 숙여버린 자신과 엄마와 신을 부정하고자 하여 자살을 시도한다.
윤수는 가정폭력과 사회의 폭력 그리고 사회의 무관심 속에 방치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소중한 동생이 아버지의 폭력으로 인해 눈이 멀고, 가출한 어머니를 기다리는 끈도, 다시 어머니에게 버림 받음으로서 놓아버린다. 사회의 무관심은 눈먼 동생하나 돌 볼 수도 없게 윤수의 어린 삶을 구석으로 내몬다. ‘애국가’를 들으면 훌륭한 사람이 된 기분이라며 형에게 ‘애국가’를 불러 주기를 간절히 원했건만, 윤수는 동생의 부탁을 들어 주지 않고, 그리고 그것이 동생과 이승에서의 마지막 이어야 했다. 흘러가는 대로 그냥 막 사는 그야말로 밑바닥인생으로 삶을 허비하다가 한 여자를 만나서 동거를 시작하게 되고 그 여자가 자궁외 임신을 하는 바람에 수술비가 없어서 돈을 구하고자 한탕을 하러 갔다가 살인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것도 17세의 어린 여학생을 성폭력 후 살인하는 엽기적인 사건을 일으키고 자신의 삶에 애착이 없는 윤수는 빨리 죽여 달라고 구치소에서까지도 악명을 드높인다.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공통점이 없는 두 사람이 사형수들을 교화하는 일을 하는 모니카수녀님의 주선으로 매주 목요일 마다 구치소 특별면회실에서 만나게 된다. 첫날 윤수는 모니카수녀님과 종교에 대해 강한 거부 반응을 나타내면서 거칠게 대한다. 자신이 죽기 전에 한번 만나보고자 한(동생이 생전 한번 보기를 소원했던) 프로야구 개막전 때 애국가를 부르던 가수가 면회 장에 와서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야 알게 될 정도로 심한 반항을 한다.
유정은 윤수의 빨리 죽여 달라고 외치는 몸부림 속에서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집에 돌아와 인터넷으로 윤수를 검색하고 윤수의 죄명이 17세 여학생 성폭력 및 살인이라는 자료를 읽고 몸서리를 친다. 정신과 치료 대신 구치소 종교위원으로 면회를 4번 해야 한다는 수녀고모와의 약속을 팽개치려 했는데, 그토록 죽어 버리기를 염원했던 엄마가 암이 재발하여 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고모가 자신 대신 엄마 문병을 가기로 해서 두 번째 윤수와
만나게 된다. 이 두 번째 만남에서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유정 자신의 상처를 들어내 보이고 윤수의 마음을 조금씩 열게 된다. 언제 사형집행을 당할지 모르는 유한의 시간들 속에서 둘은 서로의 상처를 이야기하고 그러면서 치유해 간다. 윤수가 살해한 파출부의 어머니가 윤수를 용서해 보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유정 자신은 자기의 가해자들을 용서 할 마음을 열기가 어렵다. 언제나 마지막 만남 일지 모른다는 불안한 마음을 서로가 숨기고 만남을 거듭하면서 유정의 마음도 서서히 열리게 된다. 수녀고모를 따라 가해자인 사형수들과 피해자 가족들을 만나면서 세상의 폭력에 대해서도 서서히 눈뜨게 된다. 자신이 당한 폭력 속에 갇혀서 나의 밖에서 일상으로 행해지는 폭력에는 무관심했던 방관자인 자신도 어쩌면 간접 폭력자일지도 모른다는 자각을 하게 된다.
사형수 출신 대통령이 당선되었으니 당분간 사형집행이 없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외면 한 채 윤수의 사형집행이 결정되었다는 교도관 이주임의 전화를 받고 유정은 자신이 윤수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즉, 자신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윤수가 죽음에의 갈망에서 살고 싶다고 말하는 것처럼 유정 자신도 살고 싶어진 것이다. 그리고 윤수를 살려내고 싶은 것이다. 사형이라는 제도가 국가의 폭력이라고 말한다. 절대로 용서하고 싶지 않았던 엄마를 용서하기로 한다. 그러면 자신을 외면했던 전지전능한 신이 윤수에게는 생명을 주는 은혜를 베풀지도 모른다고 다시 한 번 신을 애타게 불러본다.
윤수는 사형집행을 당하고 유정은 남는다. 다시 자살을 시도며 자학하는 유정이 아니라 이웃의 아픔을 같이 아파하고 서로 보듬어 주는 이웃으로 남는다.
3.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보고 느낀 점
시간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다. 유정이 윤수를 면회 가는 첫날 가기가 귀찮아서 30분을 늦게 되었을 때 고모의 꾸지람이 “사형수들에게는 30분이라는 시간이 얼마나 귀한 시간인지 네가 알기나 하냐?”는 것이었다. 사형수들만 시간이 소중한가? 우리들 모두 유한의 시간 속에서 꾸려가는 삶인 것을.
폭력의 연결고리를 끊을 수 있도록 온 사회가 합심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한다. 가정의 폭력이 대물림되고, 그 폭력이 사회 폭력을 낳는다. 또 나의 무관심이 이웃의 무관심으로 쌓여져서 서로에게 무관심한 사회를 만들게 된다. 특히 어린이에게 가해지는 모든 폭력은 근절되어야 한다. 이웃이 온 사회가 서로 관심 있게 지켜보고 도움의 손길을 보냈을 때 사회폭력은 많이 줄어들 것이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김혜자 씨의 말처럼 어떠한 물리력도 모두 폭력일 수 있다. 크게 때리고 크게 상처 줘야 만이 폭력이 아니라고 본다. 우리들이 평소에 아이들을 가르친다고 훈계의 목적으로 들었던 회초리도 일종의 폭력이며, 사랑의 매라 이르는 물리력도 폭력일 수 있다.
폭력, 특히 어린 날 자신을 보호 할 수 없었을 때 맞닥트린 폭력은 피해자에게 많은 상처로 남는다. 영원히 피해의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해 자신을 자학하는 소극적 폭력자(영화 속 유정)에서 부터 남에게 위해를 가하는 적극적 폭력자(영화 속 윤수)로 대물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가해자를 용서해야 한다는 명제를 던져 주었다. 소설과 영화
속에 나오는 피해자의 어머니 입장에 서 보자. 과연 용서할 마음이 생길까? 가난이 극에 달한 환경으로 묘사되었다. 극과 극은 통하는 것이어서 그 할머니가 윤수를 용서해 보고자 한 것인가? 그이도 성모마리아상을 보자기로 덮어 버릴 정도로 신-가난하지만 열심히 살았던 딸이 오로지 믿고 따르고자 했던-을 부정한다. 곧 세상을 부정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보자기를 벗기고 성모상을 보며 자신이 가해자를 용서해 보고자 하노라고 용기를 달라고 한다. 가해자를 용서하는 것을 자신과 같이 사회도 함께 실천하자고 하는 것이다.
용서라는 것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다. 피해자의 일방적인 용서는 피해자 자신의 만용이고 자기 위안일 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피해자의 만용과 위안을 위해 사회적 흉악범을 용서라는 말로 위장해 사형제 폐지를 운운해야 하기에는 요즘 사회가 극단적 범죄에 너무나 과도하게 노출되어 있다. 전두환을 보면 이 생각을 절대 바꿀 마음이 없다. 용서는 가해자의 진정한 반성과 벌을 달게 받겠다는 선행 조건이 있은 뒤에 피해자가 진정에서 우러나서 하는 용서가 진정한 용서이다. 가해자의 진정이 없고, 거듭나는 참회가 없는 용서는 사기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용서와 화해는 가해자와 피해자 사회가 진정한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들을 교화하고자 많은 사람들이 마음 졸이며 봉사하고 있다. 영화 속 윤수의 말대로 자신들의 이력에 근사한 수식어를 달려고 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들의 고통에 빗대어 나의 마음의 평화로움을 느끼고자 하는 것일까? 일면의 이러한 것도 있을 수 있으나 그들 가해자들이 진정으로 죄를 반성하고 피해자와 그의 가족들, 더 나아가 사회에게 용서를 구하는 진정한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도우고자 할 것이다. 이러한 노력들이 사회폭력의 연결고리들을 끊어 내는 시초일 수 있다.
TV연속극이나 영화를 보면 연기자의 연기력 보다는 유명세와 미모에만 치우쳐 케스팅하는 경우가 있을 때 짜증스럽다. 이번 영화도 이러한 범주에 들었지 않나 싶다. 원작 속의 주인공들이 내면에서 겪는 아픔들을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잘 살려내지 못한 것 같다. 특히 여자 주인공의 배역은 연기력이 탁월한 여자 배우를 등장시켰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4. 맺음말
영화를 보고난 다음날 신문에서 여학생들을 성폭행하고 살인한 50대 남자의 사건을 읽게 되었다. 과연 사형 제도를 폐지하여야 할 것인가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책장을 덮고, 똑 극장을 나서면서 생각한 사형제도 폐지에 관한 생각이 존속해야 하지 않겠는 가로 금세 바뀐다. 저 꽃다운 나이에 성폭력을 당하고 그러고도 모자라 목숨까지 앗겨야 하는 힘없는 아이들을 금수만도 못한 자들과 한 하늘아래서 살게 해야 하겠는가 라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하게 된다. 남편도 만일 사형제도가 없다면 이런 흉악범들이 죄를 인식이나 하고 반성이나 하겠냐는 것이다. 소설이나 영화에서 주인공 윤수가 친구의 죄를 뒤집어 쓴 또 다른 피해자가 아니라 정말 그 사건의 주범이라는 설정을 했더라면 관객이 받아들일 때 사형제도에 관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윤수가 주범이 아니어서 관객들은 더욱더 사형제 폐지 쪽에 무게를 두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지만 사형제도가 있어서 그들이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면, 피해자와 사회는 그들을 용서 하겠는가? 사형제도가 있어서 그들이 죄를 반성했다면 그것은 진정한 반성이 아니며 용서가 아니다.
사형제도는 국가의 폭력일 수도 있다. 폭력은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에게 행사하는 물리력이 폭력이다. 힘이 있는 국가가 개인에게 가하는 폭력일 수도 있다. 진정한 죄 닦음은 자신의 죄과를 반성하고 사회로부터 용서받는 것일 것이다.
폭력의 사슬은 피해자나 힘없는 쪽에서 끊는 것이 아니라 힘이 있는 쪽에서 먼저 끊어야 그 굴레로부터 벗어 날 수 있을 것이다. 어린이에게 가해지는 모든 폭력의 근절과 사형제도에 관한 문제를 진지하게 우리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심사숙고해야 할 이 시대의 우리들의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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