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졸업식 세 번, 아들들의 졸업식 여섯 번의 풍경은 천편일률적이다. 세월의 흐름들은 아랑곳 없이 옛 방식 그대로, 마트에 진열된 오래된 브랜드의 공산품처럼 거의 비슷비슷한 식순으로 짜여져 있고 진행된다. 국민의례, 졸업장 수여, 상장수여, 송사, 답사, 학교장 축사, 내빈 축사로 이어지는 소란스럽고 지루한 진행은 왜 내가 이런 행사에 참석하게 되었는지 후회하게 만드는 못된 사람으로 순식간에 만들어 버린다. 난 졸업식에 참여하여 가장 내 자신을 잘 볼 수있는 것 같다. 주변인, 아무리 아니라고 항변하지만 난 주변인이다.
졸업식에서 졸업하는 모든 사람이 주역이어야 하지만, 몇몇을 제외하고는 수많은 학생과 학부모들이 주변인으로 전락하고 만다. 평소에는 못 느끼는 이 박탈감을 졸업식에 참석하면 여실히 적나라하게 느낄 수 있다. 인생은 성적 순이라는 것을 졸업식 만큼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소가 또 있을까? 학교생활 중 공부를 열심히하고 또 열심히 한 만큼 성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학생의 본분이라는 것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그렇지만 삼년의 세월을 끝맺음하는 순간까지 꼭 성적이 좋은 아이들만 주인공으로 부각시켜야 할 만큼 공교육의 현장에서 성적 지상주의를 확인해야 하는가? 성적이 뒤쳐진 아이들은 들러리를 세워도 되는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라고 본다.
이 번 작은아들의 졸업식은 시간을 단축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그나마 졸업식에서 참석자 전원이 나름대로 주인공일 수 있는 식순을 빼버렸다. 재학생 송사와 졸업생 답사를 빼버렸다. 어떻게 보면 판에 박은 듯한 그만그만한 문구들을 나열 해서 주고 받는 것이지만, 이 시간을 통해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며, 안타깝다거나, 행복했다거나, 앞으로의 계획 등을 떠올려 볼 좋은 짬이 될 것인데 이 것을 시간 핑계로 빼버렸다.
그러고는 졸업식에서 빼도 좋을 학교 연혁보고에서 장황한 교육치적을 나열했다. 즉 서울대를 위시해서 소위 SKY에 지역의 타 학교에 비해서 얼마나 많은 인원을 입학 시켰는지를 전시했다. 이 것 또한 이해 할 수 있다. 이러한 결과로 학부모에게 그간 교사들의 각고의 노고를 인정 받고 싶어하는 취지로 이해 할 수 있다. 그러나 번지르르한 대학에 입학하지 않았다고 해도 교사들의 정성을 안 받고 3년의 학창생활을 한 학생이 있을까?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무사히 넘기면서 학교를 무사히(?) 졸업하는 모든 학생이 교사와 학부모의 열매인 것이다. 모두가 졸업식 때 만이라도 주인공인 세상으로 만들 수는 없을까?
성적우수자 상장수여식에 박수부대로 전락하여 주변인이라는 자각을 하게끔하는 졸업식보다는 좀 더 시간이 걸리겠지만, 전 졸업생이 일일이 호명되어 그간의 학창시절을 마침을 치하받고, 새출발을 축원받는 졸업장 수여식에 박수 칠 수 있는 졸업식에 동참하고 싶다. 이런 졸업식은 있을 수 없을까?
'내 안으로의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애국가와 태극기 (0) | 2009.02.18 |
---|---|
내 며늘아이에게는 택호를 지어 주리라. (0) | 2009.02.17 |
돌아 가고 싶은 시절의 대 국민 사과문 (0) | 2009.02.07 |
농수산부에 재문의와 재답변 (0) | 2008.09.02 |
농수산부에서의 답변 (0) | 2008.09.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