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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 작곡자 고 안익태 선생의 부인이 타계하셨다는 뉴스를 보고 어르신께서 애국가가 언제부터 만들어 졌느냐고 물으신다. 애국가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너무 없어서 순간 당황했다. 그냥 막연히 일제강점기때 독립군들을 중심으로 찬송가(?) 음률에 애국가 가사를 얻어서 불렀다는 것 밖에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또 아울러 태극기의 태극 문양의 빨간색은 북한을 나타내고, 파란색은 남한을 나타내느냐고 물으셔서 어르신들께 뼈속까지 내면화된 멸공의식을 새삼 실감하였다. 그런데 이 태극기에 대해서도 나는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냥 태극문양이 주역에 나오는 태극사상을 기본으로해서 빨간색은 양을 뜻하고 파란색은 음을 뜻하면 둥글게 돌아가는 것은 음양의 조화로 생성되고 돌아가는 세상을 뜻하는 것이라고 밖에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공부하기로 했다. 태극기와 애국가에 대해서.
태극기(太極旗)
우리나라 국기(國旗)인 '태극기'(太極旗)는
흰색 바탕에 가운데 태극 문양과
네 모서리의 건곤감리(乾坤坎離) 4괘(四卦)로 구성되어 있다.
태극기의 흰색 바탕은 밝음과 순수,
그리고 전통적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의 민족성을 나타내고 있다.
가운데의 태극 문양은 음(陰 : 파랑)과 양(陽 : 빨강)의 조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우주 만물이 음양의 상호 작용에 의해 생성하고 발전한다는
대자연의 진리를 형상화한 것이다.
네 모서리의 4괘는 음과 양이 서로 변화하고 발전하는 모습을
효(爻 : 음 --, 양 -)의 조합을 통해 구체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그 가운데
건괘(乾卦)는 우주 만물 중에서 하늘을,
곤괘(坤卦)는 땅을,
감괘(坎卦)는 물을,
이괘(離卦)는 불을 각각 상징한다.
이들 4괘는 태극을 중심으로 통일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와 같이,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이 생활 속에서
즐겨 사용하던 태극 문양을 중심으로 만들 어진
태극기는 우주와 더불어 끝없이
창조와 번영을 희구하는 한민족(韓民族)의 이상 을 담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태극기에 담긴 이러한 정신과 뜻을 이어받아
민족의 화합과 통일을 이룩하고,
인류의 행복과 평화에 이바지해야 할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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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각국이 국기(國旗)를 제정하여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근대 민족국가가 발달하면서부터 였다.
우리나라의 국기 제정은 1882년(고종 19년) 5월 2 2일에 체결된
조미수호 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 조인식이 그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
당시 조선 정부는 청(淸)이 자기나라 국기인
용기(龍旗) 를 약간 변형하여 사용 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이를 거부하고
우리 민족이 예로부터 즐겨 사용해 오던
태극 문양을 흰색 바탕에 빨강과 파랑으로 그려 넣은 '태극 도형기'(太極 圖形旗)를
임시 국기로 사용하였다.
그 후 국기 제정의 필요성을 느낀 조선 정부는
종전의 '태극 도형기'에 8괘(卦)를 첨가하여 '태극·8괘 도안'의 기를 만들었다.
1882년 9월 박영효(朴泳孝)는 고종(高宗)의 명을 받아
특명전권대신(特命全權大臣) 겸 수신사(修信使)로
이 국기를 지니고 일본으로 가던 중 선상에서
태극 문양과 그 둘레에 8괘 대신 건곤감리(乾坤坎離) 4괘만을 그려 넣은
'태극·4괘 도안'의 기를 만들어 바로 그 달 25일부터 사용하였다.
10월 3일 본국에 이 사실을 보고하자,
고종은 다음해인 1883년 3월 6일 왕명으로
이 '태극·4괘 도안'의 '태극기'(太極旗)를 국기(國旗)로 제정·공포하였다.
그러나 이 태극기는 구체적인 제작 방법이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
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1942년 6월 29일 국기제작법을 일치시키기 위하여
「국기통일양식」(國旗統一樣式)을 제정·공포하였으나
일반 국민에게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태극기의 제작법을 통일할 필요성이 커짐에 따라,
정부는 1949년 1월「국기시정위원회」(國旗是正委員會)를 구성하여
그 해 10월 15일에 오늘날의「국기제작법」을 확정·발표하였다.
대한민국 정부가 태극기를 국기로 계속 사용해 오고 있는 것은
태극기가 지닌 이러한 민족사적 정통성을 이어받기 위함이다. | |

애국가(愛國歌)
공식적인 국가가 아닌 나라 사랑의 정신을 일깨우는 노래로서의 애국가는 갑오개혁 이후로 상당히 많았다.
그중 스코틀랜드 민요인
〈올드 랭 사인 Auld Lang Syne〉 곡조에 붙여 부르던 〈애국가〉 가사에
안익태가 곡을 붙인 형태의 〈애국가〉가 공식 국가로 채택되어 지금에 이른다.
1896년에 학부주사 이필균의 〈애국가〉, 인천 제물포 전경퇴의 〈애국가〉, 한명원의 〈애국가〉, 북서순검 유태성의 〈애국가〉, 달성 회당예수교인의 〈애국가〉, 새문안교회 신도들이 지은 〈애국가〉, 최병희의 〈애국가〉, 평양학당 김종섭의 〈애국가〉, 정동 배재학당 문경호의 〈애국가〉, 묘동 이용우의 〈애국가〉, 배재학당 학도들의 〈애국가〉 등이 있다.
대부분 1900년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 곡조를 알 수 없으며,
새문안교회의 〈애국가〉와 배재학당 학도들이 부른 〈애국가〉만 그 곡조가 전한다.
새문안교회에서는 1896년 7월 25일 고종의 생일에 축하예배를 보면서
"높으신 상쥬님 자비론 상쥬님……"의 가사를 가진 애국가를 지어
영국의 국가 〈신이여 여왕을 구하소서 God Save the Queen〉에 얹어 불렀다고 하며,
같은 해 독립문 정초식(正礎式) 때
"성자신손(聖子神孫) 오백 년은 우리 황실이요……"의 가사로 된 애국가를 배재학당 학도들이 불렀다는데
이 곡은 스코틀랜드 민요인 〈올드 랭 사인〉에 붙여서 불렀다고 한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의 후렴구는 이때 처음 등장했다.
광무개혁을 진행하던 대한제국 정부는 국가(國歌)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이 애국가는 당시 군악대 지휘자 F.
에케르트가 작곡한 것이다.
〈대한제국애국가〉는 1904년 5월 각 학교에 배포되었다.
이로써 그동안 난무하던 애국가를 하나로 정리하려 했으나 이후에도 많은 애국가가 지어졌다.
이렇게 유행처럼 번진 애국가의 창작과 보급은 사회적으로는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음악적으로는 애국독립가류의 창가로 분류할 수 있다.
애국가 가사의 주된 내용은 자주독립·문명개화·부국강병·신교육 등이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전에 〈올드 랭 사인〉곡에다
"동해물과 백두산이……"를 붙인 애국가가 많이 불렸다.
그뒤
안익태가 1936년 베를린에서 〈애국가〉를 작곡하여
그해 베를린 올림픽에 참가한 한국선수단을 찾아가 이 곡을 함께 불렀으며,
상해임시정부와 미국·일본 등지의 교포들에게 악보를 보내어 그들에 의해서 서서히 불려지기 시작했다.
1948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면서 공식 국가로 채택되었다.
모두 4절의 가사로 된 16마디의 4/4박자의 곡이다.
작사가는 누구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며 윤치호·안창호·민영환 등이 지었다는 설이 있다.
한때 곡조가 불가리아 민요와 거의 비슷하다는 표절시비가 붙으면서
애국가를 다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현재 불리는 〈애국가〉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만세/
(후렴)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 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후렴)//
가을 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 없이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일세/(후렴)//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충성을 다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후렴)."
-이상은 대한민국 전자정부에서 퍼왔어요.-
고 안익태 선생의 친일행각 때문에 애국가가 근년에 말도 많았다. 일제국의 천화을 찬양하는 노래였다는 말들까지 무성해서 애국가를 바꿔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나도 친일과 일제국 천황을 찬양했다는 것이 사실이라며는 애국가를 바꿔야 한다는 주장에 동조한다.
그러나 난 애국가를 듣거나 부를때 여전히 가슴뭉클한 감동을 받는다. 멸공교육의 내면화로 태극의 빨간색이 북괴를 나타내고, 파란색이 자유대한을 나타낼 것이라는 어르신과 다름없이 나도 태극기나 애국가를 마주 할때는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극우주의자쪽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