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으로의 여행

꽃과의 추억

소띠여사 2009. 3. 20. 09:14

 

내겐 아직도 봄이 멀게만 느껴지는데, 길가 화단 철쭉나무 밑동에서 월동을 한 냉이가 꽃을 피웠다.

좀 더 따뜻해 지면 들녘이나 길가 화단 등 흙이 있어 냉이가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곳 어디서든 지천으로 냉이꽃이 피겠지. 그러나 너무 흔하고 조그만 꽃이라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못하고 스러져 갈 것이다.

 

나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봄날 냉이꽃을 만나면 가슴이 따뜻해지면서 눈가가 촉촉해 진다. 하얗고 조그마한 꽃송이들에게서 아들의 예쁜마음이 그때 그날처럼 지금도 여전히 내게 전해져 오기 때문이다.

 

작은 아이가 유치원에 다니면서부터는 곧잘 밖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놀았다. 형을 따라서 놀기도 하고 아파트 이웃의 또래 아이들하고도 잘 놀았다. 어느날 놀러나간 아들이 의기양양하게 들어와서  "엄마 선물이야!"하면서 하얀 꽃묶음을 내게 내밀었다. 자잘한 흰 꽃들이 깨처럼 붙어있는 아주 가느다란 꽃송이들을 손가락 굵기 만큼 따서 꽃묶음을 만들어 왔다. 엄마가 좋아하는 꽃을 선물했다는 뿌듯함이 있었는지, 아니면 저도 그 꽃의 연녹과 흰색의 어우러짐이 아름다웠는지 "예쁘지?"를 연발하면서 즐거워했다.

 

따까운 봄볕아래 쪼그리고 앉아 그 작은 손으로 엄마에게 주려는 마음을 담아 하나하나 꺽었을 내아이의 수고가 가슴으로 전해졌다. 내 아이의 수고나 마음이 담겨 있지 않더라도 그 냉이꽃 묶음은 예뻤다. 정말 예뻤다. 존재감없이 흩어져 있던 들꽃이 누군가의 눈길과 손길을 거쳐서 마음으로 오면, 애지중지 키우는 화려한 화초보다 더 아름답다는 것을 깨닿게 해주었다.

 

그 냉이꽃 묶음은 저절로 드라이플라워가 되어서 그 후로도 오랫동안 우리집 주방에서 우리가족과 함께 있었다. 어느 어버이날 작은애가 사온 노래가 나오는 카네이션에게 그 자리를 내 줄때까지. 그래도 그 냉이꽃 묶음은 매콤한 그 특유의 향기와 함께 내 가슴속에 꽂혀있다.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냉이꽃은 내 아들이다.

 

냉이꽃 꽃말을 찾아보니 '당신에게 내 모든것을 드립니다.' '봄처녀'란다. 아이도 나도 그땐 냉이꽃의 꽃말을 몰랐지만 아들이 준 그 꽃묶음은 정말 '당신에게 내 모든것을 드립니다'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냉이꽃의 실재 꽃말이 그와 정반대였다 할지라도.

 

내게 동백꽃은 아련한 추억 속의 신비로움이다. 뭐라고 딱히 표현할 수 없지만, 신새벽의 심심산골 풍경을 희뿌연 물안개로 표현하는 한 폭의 동양화를 보고 있는 듯한 촉촉함이랄까? 빛바랜 흑백사진 속의 끊겨진 토막토막의 기억이랄까? 아뭇튼 동백꽃은 나에게는 환상이다. 늘 손에 잡히지 않는 미지의 세계로 가는 문가에 서 있는 꽃으로 처음 내게 온 꽃이었다.

 

동네 친구는 나보다 한 살 더 많았고, 내가 알지 못하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다.

그 친구의 사촌 오빠가 장가를 들었다. 어찌된 영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신랑집에서 혼례를 올렸었다. 친구의 집이었는지, 아니면 그 이웃의 집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담벼락 대신 심어둔 사철나무 울타리에서 푸르고 싱싱한 사철나무를 꺽어서 화환을 만들어서 신랑 신부의 목에 걸어줬었는데, 아주 선명한 빨간색의 종이꽃을 사철나무 화환에 군데군데 꽂아서 멋들어진 꽃장식이었었다.


 

푸르른 녹색에 대비 되는 빨간색 꽃은 신비롭기까지 했다. 친구의 말이 더욱더 신비로움의 꽃으로 동백을 내게 심어주었다. 우리동네에서는 만날 수 없는 꽃이지만 아주 먼 곳에 실재하는 동백꽃이 있고, 결혼을 할때는 꼭 그 꽃을 꺽어서 화환으로 쓴다는 것이었다.

그시절 나는 '명화극장'에 심취했었는데, 그 영화 속의 외국과 동백꽃이 실재한다는 먼 곳이 동일시 되었었다. 그리고 내가 어른이 된다거나, 시집을 간다는 것들이, 영화 속의 세상들처럼  그냥 만질 수도 경험해 볼 수도 없는 그져 TV 화면으로 가로막혀진 나와는 무관한 세계 속의 일들로 여겨졌기 때문에 더욱더 동백꽃은 환상과 신비로움이었다.


 

동백꽃은 내게 '와!'하는 탄성이다.

트럭을 타고 12시간을 달려서 '진짜 땅끝'에 도착했고, 거기서 또 철선으로  한 시간 반을 바다를 가로질러 도착한 곳이 보길도였다. 정말 절해 고도였고, 나는 유폐되었다. 내가 없는 나날이었다. 울어대는 아이와 아이같은 남편과 마루끝에 서서 내다보면 파란 바다만이 있는 세상이었다. 초보 엄마와 아내, 초보 아빠와 남편이 힘겹게 1년여를 보내고 그 곳에 길들여 졌을 쯤 만난 꽃이, 발길 닿는 곳 어디서든 만날 수 있는 동백꽃이었다.


 

보길도의 동백꽃은 11월쯤부터 피어서 이듬해 5월까지 꽃이 피고 진다. 빨간꽃 속에 샛노란 수술을 달고 매혹적으로 피어나서 몇 일만에 미련없이 낙화하는 동백꽃은 보길도에 갇혀서 아등바등 집착하는 나를 피안의 세계로 인도하는 듯 하였다. 전혀 상하지 않은 꽃잎이 낙화하여 꽃무덤을 만들어 놓은 동백꽃은 꼭 청춘을 불사르다 스러지는 무모함을 느끼며, 그 반면에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위엄이 느껴진다. 동백꽃 꽃무덤에서는 서로 상반되는 두 세계를 만날 수 있다.

 

나의 유폐를 위로해 주었던 꽃. 동백꽃은 사랑이다.

300년 전 그 곳에 고산선생에 의해 뿌리를 내렸다는 세연정의 아름드리 동백나무 밑의 꽃무덤에서 아장걸음으로 봄맞이를 하던 큰 아이. 넘어질듯 하면서도 넘어지지 않고 꽃을 주워 뒤뚱거리며 내게 달려오던 내아이와 더불어 빨간 동백꽃은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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