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으로의 여행

안나 카레니나 - 레프 톨스토이

소띠여사 2014. 11. 8. 17:28

안나 카레니나

                                           레프 톨스토이 저 / 박형규 옮김/ 문학동네

 

나는 젊은 시절 폼을 잡고자 방판 아저씨에게 산 세계 문학 전집의 소설들을 몇 장 읽다가 덮고 또 다시 초입 부분만 읽다가 덮던 식으로 20권의 고전을 섭렵했던 전력이 있다. 세로쓰기로 되어 읽기도 불편했던 그 책들은 폐지로 처분되어 지금은 단 한 권도 내 책장에 없다. 그 전집 목록에 있었던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도 초입부분만 몇 번을 읽다가 중도에 포기한 책들 중의 하나였다.

 

폰으로 영화 보고 원작 읽기 3탄으로 쭉 사랑에 대한 탐구를 하고자 선택한 안나 카레니나는 2시간여의 영화 시간과는 다르게 책은 무려 500여 페이지로 된 3권짜리여서 느릿느릿 책을 읽는 습관이 붙은 나는 읽어 내기가 쉽지 않았다. 젊은 날에는 책읽기에 끈기가 없었지만 나이 먹고 나서 좋은 점은 조바심 내지 않고 끈기 있게 마지막 장까지 책을 읽어 낼 수 있는 인내를 발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책의 내용의 이해도는 아마도 젊은 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지라도.

 

영화 안나 카레니나는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을 주제로 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그들의 부분만을 주요 내용으로 영화화해서 아주 가슴 아픈 사랑이야기의 멜로드라마라고 할 수 있겠지만, 소설 안나 카레니나는 나의 견해로는 세 쌍의 부부에 대한 이야기로서 참 사랑을 찾고자하는 소설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스테판과 다리야 부부는 방탕한 스테판의 생활로 위기에 놓이지만 다리야가 아이들이 겪을 아버지의 부재에 대한 혼란과 이혼한 여자로서의 새 생활에 대한 두려움 등으로 인해 결혼 당시의 사랑했던 감정을 현재성으로 애써 위안하면서 그럭저럭 살아내는 부부이다. 다리야는 안나의 정열적인 사랑을 지지는 하나 자신의 아이들을 떠나서는 살아갈 수는 없다는 전형적인 모성애의 소유자이다.

 

카레닌과 안나는 나이차이가 20 여 살이나 나는 부부이다. 남편 카레닌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교회법에 순응하며 살고자 노력하는 동시에 행정부의 고위 관료서의 위신을 중요시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안나의 부정을 알았지만 겉으로만 완벽한 부부로 살기를 원한다. 반면 안나는 사랑이 없이 겉모습만 부부 행세를 하는 것은 자신을 기만하는 죄라고 말한다. 그래서 브론스키와 사랑에 빠져서 딸을 낳고 집을 뛰쳐나와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하지만 아들 세르게이 문제에 부닥쳐 이혼하지 못한다.

 

브론스키는 자신의 사회적 출세까지 포기하면서 안나와 사랑의 도피를 감행하지만 남자로서 언제까지 집안에만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안나와 자신의 아이들을 낳고 법적으로 떳떳한 부부가 되려고 안나에게 아들 세르게이를 포기하고 남편에게 이혼을 간청하기를 바라지만 안나는 끝까지 아들을 포기하지 않았고 이혼하지 못한다.

 

안나의 브론스키에 대한 집착은 도를 넘게 되고 브론스키는 이런 안나를 부담스러워한다. 타오르는 불은 언젠가는 사그라진다. 사랑도 그렇다. 그 사랑이 사회 통념과 반하는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나의 견해로는 안나는 자기애가 아주 강한 여성인 듯싶다. 아들이 부재하는 엄마, 즉 안나 자신 때문에 겪을 고통에 마음 아픈 것이 아니라 아들이 아버지 손에서 자라 부정한 여자로 자신을 낙인찍을 것에 더 고통스러워한다. 브론스키가 바라는 정상적인 부부, 즉 법적인 부부가 되는 것에도 카레닌에게 이혼을 간청해야 하는 비참함을 견딜 수 없어서 소극적으로 대처한다. 안나는 자신이 벌려 놓은 사랑행각으로 두 남자와 두 자녀를 불행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에는 별로 죄책감이 없는 듯싶다. 두고 온 아들에의 연민에 브론스키와의 사이에 낳은 딸은 최소한의 모정도 허락하지 않는다. 오로지 브론스키에게 집착하느라 여러 상식들을 습득하고 자신의 외모를 치장하는데 전력한다.

 

왜 톨스토이는 안나가 자신을 뒤돌아보고 최소한의 반성이라도 하는 인물로 묘사하지 않았을까? 자기 자신의 주체성만을 찾는 인물로 묘사했을까? 모성애에 밀려 여자로서는 불행한 가정생활을 영위하는 다리야와의 대조를 위해였을까?

 

안나는 복수를 하기 위해 브론스키와 첫 만남이 있었던 기차역에서의 에피소드의 노동자가 당한 기차사고처럼 자신도 기차에 뛰어들어 자살을 한다. 브론스키가 남은 생을 자신과의 사랑에 대한 회한으로 살아갈 것이 복수라고 생각하면서. 안나의 바람대로 브론스키는 삶의 의욕을 잃어버렸고 세르비아의 전쟁터로 떠난다.

 

이 소설의 진짜 주인공인 레빈과 키티 부부는 우여곡절 끝에 결혼한다. 브론스키에게 빠진 키티가 레빈의 청혼을 거절하게 되고 이에 상심한 레빈은 시골 자신의 영지로 가서 자신만의 방법으로 농촌운동을 펼친다. 키티는 안나를 따라 페테르브르크로 떠나버린 브론스키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외국으로 요양을 떠나야 할 정도로 심신이 피폐해진다.

 

다리야가 머물고 있는 레빈의 이웃 영지로 새벽에 마차를 타고 오는 키티를 보게 된 레빈은 자신이 키티를 아직도 정말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나 키티의 마음을 알지 못해 주저한다. 레빈을 좋아하는 다리야와 키티의 아버지의 노력으로 키티와 재회하고 둘은 서로 사랑으로 결혼하게 된다.

 

키티는 레빈을 따르고자 신혼여행도 마다하고 레빈의 영지에서 신접살림을 시작한다. 안주인으로서 레빈의 집을 자신 방식대로 조용하고 서서히 바꾼다. 늘 레빈에게 순종하는 것 같으면서도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는 데는 지지 않는 강단을 보인다. 레빈은 자신의 집이 키티화 되어 가는 것에 속수무책임을 절감한다. 레빈은 독신 시절 동안 누리고 빠져들었던 농부로서의 삶은 키티로 인해 많은 제약을 받는다. 귀족으로서의 사교 생활을 해야 하는 불편함도 감수해야 한다. 첫아이를 출산할때 무신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무의식적으로 신을 찾았던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면서 신에게로 귀의를 다짐하며 소설은 끝난다.

 

서로 사랑하지만 이상이 다른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이 어떻게 펼쳐질까? 아마 이 부부는 슬기롭게 서로 상이한 이상의 합일점을 찾을 것 같다. 작가 톨스토이는 레빈에게 자신의 사상(톨스토이주의-초기 기독교 사회로의 회귀)을 투영해 놓았다고 역자는 말한다. 실재 톨스토이는 자신의 사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인과의 불화로 가출하여 아스타보역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부디 레빈과 키티는 변치않는 사랑으로 지향하는 세계도 같아지기를 소망해 본다.

 

이 소설은 1800년대의 러시아 역사를 알고 읽는다면 더 깊이 이해 할 수 있을 듯싶다. 러시아 혁명, 슬라브주의, 농노해방 등 그 시대 러시아 역사와 인접 유럽의 역사에 대한 상식이 없는 나로서는 레빈의 치열한 고뇌와 등장인물들의 여러 에피소드들을 이해하기가 난해했다. ‘농노제 붕괴에서 러시아혁명에 이르는 한 시대의 초상을 그려낸 인류 보편의 걸작’이라는 책 표지의 소개말을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길 때까지 온전히 이해할 수가 없다.

 

현재 우리들은 외제에 대한 이중의 잣대를 가지고 있다. 동경하면서도 폄하하거나, 글로벌을 외치면서도 한편으론 우리 것을 외치는 양면성을 띠고 있다. 1800년대 후기 러시아의 사회의 사람들도 그랬었나 보다. 농지 경작 방법에 있어서 외국의 기계화를 들여와야 한다는 견해와 러시아 농지와 농민에게 외국의 것이 맞지 않는다는 견해의 충돌, 어떤 집을 소개할 때 프랑스와 영국의 가구나 풍으로 장식했다는 묘사에서는 외국에 대한 동경을 엿볼 수 있고, 가정교사나 레스토랑의 지배인, 가수 등 부리는 사람들이 프랑스나 영국에서 일자리를 찾아 들어온 이방인으로 묘사한 것에서는 폄하하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책이 쓰였던 시대의 역사나 인물들을 공부 해 볼 수 있는 기회나 숙제가 생기는 것이 고전을 읽는 즐거움 중의 하나인 것 같다. 안나 카레니나를 읽으면서 1800년대의 유럽보다 조금 늦은 러시아의 근대로의 전환기로 역동적인 역사적인 사건들을 겉 표면이나마 훑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러시아 혁명과 슬라브주의에 대해서 다시 찾아 읽어 보아야겠다. 그리고 톨스토이의 다른 소설들도 읽도록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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