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으로의 여행

둘쨋날 이야기

소띠여사 2006. 3. 9. 00:06

  한 시간을 덤으로 돌려받아 사는 맛을 느껴 보라는 가이등의 농담을 들었지만, 그냥 시계바늘이 가리키는 시간을 따라 사는 우리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 듯싶었다. 아침 6시(우리시간 7시)의 기상은 힘들기만 하다. 우리 일행은 가이드의 안내대로 3층 한식당에서 아침을 먹었지만 우리리부부는 딴 짓을 하다 가이드의 안내를 놓치는 바람에 2층 양식당을 찾아갔다. 어찌 이상하게 우리 일행은 한명도 보이지 않고 서양인들만 드무드문 보이는 것이었다. 아직 안내려 왔겠지 하는 마음으로 밥을 찾으니 밥은 없고 빵들만 가득 진열을 해 놓았다. 웨이터에게 밥을 요청했더니 어딘가로 가서 머리에 요리사 모자를 쓴 사람을 불러왔다. 토막말로 '라이스'라고 하니 알았단다. 어디론가 가서 한참 있다가 내민 것이 잼 두 개였다. '노 노 노' 도리질을 하고 '라이스'를 외쳐대도 모른단다. 할 수 없이 남편이 메모지에 백미식(白米食)이라고 썼다. 아하! 알았단다. '을라이쓰' 혀가 엄청 꼬부라진 발음을 한다. 내가 한 어줍잖은 '라이스'는 아마 '나이스' 쯤으로 들려서 '나이스'라는 상표가 붙은 잼을 가져왔나 보다. 금방 흰쌀밥 두 공기가 배달되었다. 아침부터 참 재미있다. 가져간 김치에 밥 한 공기 비우고, 가져다준 잼에 빵도 찍어먹고, 입가심으로 우유에 시리얼을 말아서 아주 만족스러운 조찬 파티를 했다. 옆자리의 서양인이 동양인으로 보이는 사람과 마주 보고 식사를 한다. 먼저 먹은 서양인이 종이 냅킨을 코에 대고 온 식당안에 다 들리도록 코를 풀어 제낀다. 둘레의 사람은 고사하고 같이 앉아 식사하는 사람도 개의치 않는 것이 순 '쌍놈'의 짓거리이다 싶다. 우리네 정서의 잣대로 재자면....

  버스기사의 난폭운전으로 심히 마음이 상했다. 우리네처럼 길이 막히는 것이 아닌데도 앞에 승용차가 좀 길을 막는다 싶으면 신경질 적으로 빵빵대고, 교차로에서의 막무가내식 끼어들기 등등 전혀 승객의 안전은 염두에 두지 않고 기사 성질대로 운전하는 모양이 마을을 상하게 했다. 여행의 여흥을 깨는 무식한 행위로 느껴진다. 가이드에게 난폭운전을 자제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난색을 표한다. 버스기사들의 지위가 대단하단다. 지극히 중국적인 것으로 이해해야 할까싶다.

  2시간여를 이동해서 만리장성을 구경할 곳에 도착하였다. 정말 거대했다.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서 굽이굽이 쌓아놓은 장성을 눈이 따라가지 못해 못다 보았다. 평지여서 북경을 보호 하고자 만리장성을 쌓은 줄 알았는데 가보니 험준한 산등성이에 굽이굽이 성벽을 쌓았다. 굳이 산세가 험준해서 성벽을 쌓지 않아도 될 성 싶었는데 정복자들이 포로들과 유민들을 붙잡아서 폭동도 줄이고 관리하는 목적과 북방의 미인족 침입을 대비하는 목적으로 쌓았단다. 몽골족, 동이족 등을 오랑캐라 하여 멸시한 듯 하면서도 두려워 하기는 했나보다. 중국인들이 두려워한 이민족에 이(夷)자를 붙였다 한다. 그들이 두려워한 오랑캐 동이족이 우리의 조상 고구려의 사람들이 아닌가? 뭍혀버린 고조선과 고구려의 역사를 꼭 찾아 길이 후손에 전해야 한다고 다짐도 해본다. 이렇듯 만리장성을 쌓고 북방 이민족의 침입에 대비했지만, 징기스칸의 달리는 말은 못 막아 낸 원인이 무엇이었을까도 생각 해본다. 손톱만큼도 안된 지식을 가지고 보자기 만큼 펼칠려고 하니 에꿋은  머리만 아팠다. 이곳에서부터 '아줌마 싸다 천원'을 귀가 따갑게 들었다. 우리말 보다 한 두 옥타브 높은 음으로 외쳐대는 싸다 천원은 시끄러움 그 자체였다.

 

 

   점심을 먹는 것이 전쟁을 방불케 한다. 몰려드는 관광객들로 식당은 만원이었다. 가이드가 테이블을 잡을 동안 한 건물에 붙어 있는 기념품 상에서 쇼핑을 하란다. 식당의 입출구가 한곳이었고, 기념품 가게를 들러서 들고 나도록 지어진 집이었다. 중국인들의 상술에 감탄을 자아낸다. 우리는 손님편의를 최대한으로 생각하는데 그들은 그들의 장삿속 편의를 최대한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 입맛이 씁쓸하다. 억지 춘향으로 아이쇼핑을 하고 들어간 식당에서 시끄러운 소리와 입맛에 전혀 맞지 않는 향신료와 무엇이든 요구해도 반응 없는 소저들로 인하여 헛배만 불러서 나왔다.

  하루를 구경해도 다 못한다는 자금성을 우리는 반나절에 해내자고 가이드를 따라 나섰다. 경복궁을 설명해 주시는 '궁궐지킴이' 분들의 친절한 설명까지는 아니라도 수박 겉핥기라도 해주리라는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진다. 곧장 북문으로 들어가서 천안문으로 바삐 나왔다. 용마루가 없는 이화원의 민둥 지붕이 아니라 거창한 용마루로 치장한 거대한 궁궐. 멀리서 보면 붉은 빛이 나던 궁궐지붕이 가까이 보니 황금색이다. 999칸의 경복궁에서 임금을 모시는 조선의 사신이 9,999칸의 자금성에와서 천황을 알현하고 주눅 드는게 당연했겠다 싶은 생각도 든다. 하여도 사대주의에 사로잡혀 나라와 백성을 도외시한 선조들에게 면죄부를 주기는 싫다. 선조 뿐만이 아니라 작금의 사대에 물든 자들도 싫다. 지지난 여름 땀을 뻘뻘 흘리며 경복궁을 관람한 그 감회를- 실내조명을 위해 비뚤비뚤 돌을 깔았다는 대전 앞마당의 과학성, 벽 하나에서 굴뚝 하나까지 아름다운 문양으로 멋을 부려 만든 멋스러움 등 자랑스러운 우리의 문화를 크기로만  평가하여 절하할 수 있을까? 난 일행들이 우리 역사유적을 초라하다고 비하하는 말에 절대 동의 할 수 없었다.

 

 

   북경공항에서 다시 비행기를 타고 장가계로 이동했다. 긴 비행시간이었다. 중국이라는 나라의 땅덩이가 크기는 크나보다. 장장 두 시간 반을 비행기 안에서 있어야 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북경의 야경이 인상적이다. 국민성이 빨간색을 좋아한다고는 해도 내려다보이는 곳곳의 대형 간판이 모두가 빨강색 일색이다. 호텔 엘리베이터에 깔린 양탄자도 빨간색이었다. 2002년 월드컵 응원, 즉 be the Reds의 빨간 티셔츠에서 빨간색의 면역이 생기지 않았드라면 몹시 당황스러운 거리 풍경이었을 것이다. 반공 세대인 내게 빨강색은, 그것도 공산국가에서 맞닥트린 빨간색은 일말의 두려움을 느끼게도 했다. 공산국가라서 빨간색 들로 덮였다는 어르신들께 예로부터 빨간색이 중국국민들이 선호하는 색이어서 빨간색 천지라고  설명 드리는 나도 북경의 빨간색은 이질적이었다.

   밤 9시가 넘어서 장가계 하와 공항에 내렸다. 우리의 봄 날씨처럼 따뜻할 거라는 사전의 안내와는 달리 추웠다. 마중 나온 가이드를  따라 오른 버스 안이 북경의 버스처럼 한기가 돈다. 중국의 버스들은 손님들이 모두 승차를 하면 시동을 걸고 스팀을 트는게 관례인가 보다. 기름 값 절약을  위해서 손님의 추위쯤은 상관 않는 처사가 몹시 불쾌하고 우리네 손님 대접 정서와 비교가 된다. 대국이라는 자부심으로 아주 자기 중심적인 정서가 강한 듯 보였다. 교포가 운영하는 식당으로 안내되어 북경과는 대조적인 초라한(?) 저녁밥을 먹었다. 하지만 역겹던 향신료 냄새로 부터 해방되어 피곤함을 덜어 주었다. 소주잔이 돌려지고 고량주 잔이 돌려지고... 이국에서의 또 한밤이 깊어간다. 북경의 호텔과는 비교하지 말라는 가이드의 설명를 듣고 투숙한  별 네개짜리 호텔에서 손만 대면 고장나는 욕실의 수도꼭지들과 방음이 전혀 되지 않는 시끄러움과 동침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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