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으로의 여행

효몽(曉夢)

소띠여사 2011. 12. 14. 20:53

내가 뭘 잘못했는지 기억해 내기가 어렵다.

왜 이런 참담함을 겪어 내야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내가 아들을 낳았었는지 낳지 못했었는지도 도통 기억할 수가 없다.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켜서 어른들에게 한마디도 나를 변호할 수 없었다.

그져 손이 없어 손을 봐야 한다니 따를 수 밖에.

 

그에게서 손을 볼 여자라며,

시어른 중 누구인지는 모르나 좀 미숙한 여인을 데려왔다.

나에겐 잠깐 윗동네에 다녀오란다.

내게 닥친 이 이해 할 수 없는 상황앞에서

분노도 할 수 없었고, 거역도 할 수 없어서 그냥 대문을 나섰다.

 

윗동네에 무슨 심부름을 갔었는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하얗게 텅 비어버린 머릿속에서

하나의 생각만은 또렸했다.

그가,

아니 설마 그가 그 여인을 받아 들였을리 없다는 굳건한 믿음.

터벅터벅 걸어서 대문안으로 들어섰다.

 

샘가에서 할머니께서 그 여인에게 뭔가를 시키고 계셨다.

오랜만에 보는 할머니라서 반가웠지만 할머니도 나도 서로 서먹한 눈길만 교차했다.

아니 할머니께서는 날 못 본척 하셨다.

열심히 할머니의 채근을 들으며 뭔가를 씻는 그 여인의 얼굴을 본 순간

내 믿음이 한 순간에 와그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녀의 미숙함은 가장된 것이었다.

나를 흘깃보며 해맑게 생긋웃는 그 웃음속에

'너 이제 가봐. 게임은 끝났어.'라는 메시지가 담겨져 있었다.

내가 윗동네에 다녀온 시간이 도데체 얼마나 흘렀는지

그새 그녀는 잉태를 했단다.

 

터벅거리고 부엌엘 들어갔다.

이제껏 내가 들락였던 그곳은 생소하지 않겠지.

날 밀어내지 않겠지.

마당 샘가와 마찬가지로 부엌의 냉기도 날 밀쳐내고 있었다.

어머님께서 아무말 없이 익힌 삼타래와 생 삼타래를 물을 젹셔 건져내고 계셨다.

얼른 그 일을 돕는데 어머님께서는 일을 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도무지 그분의 맘을 읽을 수가 없다.

 

그가 가게쪽으로 난 쪽문을 통해 부엌엘 들어 오다 나를 보자마자

지금 뭘 하느냐고 버럭 역정을 낸다.

그의 목소리 속에

나에 대한 미안함, 부끄러움, 이 상황에서 날 내칠 수도 날 잡을 수도 없다는 절망감 등등이 묻어 나왔다.

그도 나처럼 혼란스러움 속에 휩쌓여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도 어떻게 할 지 아직 갈피를 잡지 못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가 알지 못하는 그자신의 내면도 나는 알 수가 있다.

그럴 수 있을 만큼 우리는 세월을 같이했고 서로 마음과 마음을 주고 받았었었다.

이런 나이고 그인데,

어쩌자고 어쩌자고 이런 참혹하기 그지 없는 일이 벌어져 버렸는가?

 

눈물도 원망도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퍼득 든다.

그도 얼마나 괴롭겠는가?

어머님도, 윗 동네에 날 데리고 가셨다가 아직 나타나지 않는 아버님도, 할머님도, 저여인마져도

이 말도 안되는 상황이 나만큼 버겁겠지.

그 어색하고 무겁게 가라앉은 부엌의 공기속에서 날 끄집어 내어준 그가 고맙다는 생각을 했다.

영원히 나만을 위한 그라고 믿었고, 믿고 싶었었는데 내 바람과 믿음은 산산 조각이 났다.

 

그런데 그의 배반에 대한 분노와 원망보다는 날 부엌문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해 주는 그가 정말 고마웠다.

이후에 그가 지고 가야할 마음의 짐이 너무 무거워 쓰러질까 걱정이 되었다.

내가 그짐을 같이 나눠 져 주지 않으면 누가 그의 짐의 무게를 덜어 줄 이가 이세상에 있을까?

내 참담함보다 내 분노보다 내 절망보다 그의 내려앉은 뒷모습이 더 무거워보였다.

 

그를 따라 부엌문을 나서면서

그냥 마루에 눌러 앉아 볼까?

그래서 어쩌자고?

이 발길 그대로 대문밖으로 나갈까?

그리곤 어찌하려고?

머릿속에서는 어머님이 다듬고 계신 삼타래 만큼이나 생각들이 꼬리를 문다.

 

그래 그를 위해 내가 대문밖으로 나가야겠지라는 생각을 하며

그에게 나는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 축 쳐진 그의 등짝을 한대 후려쳤다.

배신에 대한 원망과 분노와 슬픔 등 내 맘이 내 손바닥을 통해 그에게 전달 되었으리라.

내가 그를 알듯이 그도 나를 알리라.

눈물 한방울, 소리 한 번 내지 않는 내 심정을.

 

부엌 문턱을 막 넘어서려고 할 순간 퍼득 생각이 났다.

그래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데 내게도 아들이 있었지.

그애에게 가야겠구나.

그래 찾아가 보자.

아이는 그의 아들이 아니라 내아들이지!

암! 내아들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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