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의 숲
- 무라카미 하루키, 양억관, 민음사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이란 노래도, 동명의 무라카미 소설도
어떤 짤막한 칼럼(비틀즈의 노래에도 무라카미의 소설에도 '노르웨이의 숲'은 없다는)을
읽기 전까지는 세상에 존재하는 지도 몰랐을 정도로 무지했었다.
비틀즈의 노래는 번역된 가사를 읽으며 '불타는 청춘의 목마름'에 약간의 실소를 곁들여 이해해 줬었다.
참 재미있는 상황이었고,
분별력(남성성에 대한 무지?) 있는 여자친구였고,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몰라도 여자친구가 자랑한 노르웨이산 가구에 불을 질러버린(사랑받는 가구에게 질투하는)
그 울분(?)을 노래로 승화시킨 위대한 음악인을 알게 되어 기뻣었다.
그리고 청춘을 버거워하며 그 터널을 지나고 있을 내 아들들을 생각했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은 설원 속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곁들인 침엽수림을 연상하기에는 좀 우중충한 소설인 것 같다.
무려 세 명의 자살과 병사(책임지지 않는 부모)등의 칙칙함,
청춘기(성장기)의 고뇌가 오로지 섹스에 대한 갈망으로 표현되는 난잡함,
..........
미려한(수려한) 문장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강점이라고 하는데 인정하는 부분들도 있고, 너무 몽환적이고 퇴폐적이어서 거부감도 있다.
"젊은 시절은 포르노와 사랑이 교차하는 시절로 기억될 수밖에 없다, 달리 표현하자면,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 무장한 고급 포르노의 시절이 바로 우리의 젊은 시절이라고 할 수 있다.(감정수업)"라고 한 강신주의 해설을 읽고서 이 소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성장소설이 어른들도 하지 않을 것 같은 농염한 성애와 사랑이라는 감정도 없이 쉽게 몸을 섞고서도 상처받지 않는 젊은 영혼들을 내세워 작가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단 한마디도, 단 한 줄도 진짜 노르웨이의 숲에 대한 언급이 없는 소설 '노르웨이의 숲'은
나오코가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 비틀즈의 동명의 곡을 좋아한다는 연관성에서,
비틀즈의 노랫말과 노래의 탄생 비화를 알아야
강신주씨의 해석과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과 소설 제목과의 연관성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은 내가 읽은 성장 소설 중 가장 감흥받지 못한 소설이다.
비틀즈의 노랫말에는 아픈(좌절된) 청춘의 위트가 살아있어 공감할 수 있으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 무장한 고급 포르노'로 우리들(나)의 지나온 성장통을 퉁치기엔 너무 헐값이어서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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